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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교육부 이야기/부모의 지혜 나눔

진도의 왕궁터, 용장산성을 아시나요?

대한민국 교육부 2013. 5. 4. 09:00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사적 제126호인 고려 시대의 산성 용장산성. 다른 유명한 유적지에 가면 북적북적하건만 이곳은 찾는 이가 거의 없는 한적한 유적지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왜 이곳에 용장산성을 만들었을까요? 

고려는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고려정부는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속국이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항전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몽골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정부를 세우고 왕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몽골군에 싸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장산성입니다. 

용장산성은 고려 시대 삼별초군이 제주도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마지막 항쟁을 하였던 산성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몽골에 항복한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기지가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물에 약한 부대였습니다. 용장산성은 외성의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알려진 명량해협과 접해 있어 몽골군에 맞서기 좋은 장소입니다. 

이 용장산성은 고려 시대의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나성형식입니다. 현재 해발 264m의 용장산 좌우의 능선을 따라 약간씩의 돌로 쌓아놓은 성 일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내에는 용장 사지와 왕궁지가 남아 있습니다. 

용장산성을 가는 길은 평탄하지는 않습니다. 굽이 굽은 길을 따라가다 만난 용장산성. 이 먼 개경에서 이곳까지 왔을 그들을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몽골군에게 무릎을 꿇고 하수인이 되어 정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자주적으로 정통고려정부를 끝까지 고집하며 항쟁한 선인들의 굳은 결의를 느끼며 산등성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용장산성 안에 당시 왕족을 위해 세웠던 왕궁은 터만 남아 단별로 많게는 10여 채의 건물들이 있었던 흔적이 있습니다. 왕궁터는 마치 계단식 논을 보는 듯 층층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큰 돌 틈엔 작은 돌을 박아 튼실하게 다져져 있습니다. 규모만 작을 뿐 고려 왕궁이었던 개성 만월대의 구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198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용장산성은 단기간에 사용되었음에도 도성으로 갖추어야 할 왕궁지와 이를 둘러싼 흙으로 이루어진 내성 및 외성에 해당하는 약 13Km에 이르는 대규모의 산성 및 부대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공간구조를 밝혀줄 수 있는 산성 내부의 건물지와 제사유적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아궁이와 배수로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왕궁터 아래 우물이 나그네의 목을 적시라는 듯 정겹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용장산성 발굴조사 결과 축조시기 및 사용시기를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되는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왕궁지에서 막새기와와 평기와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청자, 분청자기, 백자 등 도자기 편이나 청동기 철기 편, 불두도 발견되었습니다. 

제사 건물지에서는 동전류, 토제, 철제마, 청자잔과 받침, 철화장고편을 비롯한 각종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등 자기류, 청동거울 및 청동 수저, 벼루 등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제사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용장산성의 다양한 유물들은 용장산성 자락의 유물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진도의 고려정부는 몽골의 일본 정벌 실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용장산성은 나라를 침범한 외세에 절대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역사적인 곳입니다. 

용장산성 아래에는 고려항쟁충혼탑이 세워져 있어 외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한 삼별초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곳 진도에서 자주정신이 깃든 역사적인 용장산성을 만나보세요. 꿋꿋한 기상의 우리 역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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