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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민서포터즈

땅끝마을 해남향교를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교육부 2013. 11. 14. 13:00

저는 7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중국어도 함께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중국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중국 간자체는 매우 익숙하지만, '한자'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문이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게는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한문이 중국 간자체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번에 할아버지 기일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인 땅끝마을 해남에 내려가면서 겸사겸사 우리 아버지가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웠다는 향교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하늘 천, 따지. 큰 소리로 천자문 외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는데 너무나 조용한 향교가 우직하게 떡하니 버티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중, 고등학교로 여러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가운데 큰 대문에 '해남향교'라는 팻말이 있고 커다란 태극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항상 잠겨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니는 길은 주차금지라는 표지판 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커다란 이 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아침에 많은 학생이 서로 재잘거리면서 향교로 들어왔을 것 같습니다. 혹시 향교의 큰 대문 앞에 학생들의 머리와 복장을 검사하는 선도부들은 없었는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우리 학교 교문도 사진에서처럼 멋지게 기와지붕을 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해남향교 이력비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한자가 가득하게 있어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한자가 적은 위 사진을 골랐는데 그래도 한자가 가득합니다. 마치 외계어 같아서 눈이 흐릿해지고 복잡해집니다. 아버지께 무슨 뜻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이력비의 내용은 향교의 유래와 향교의 구조가 설명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우리나라 대부분 향교가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해남향교는 화재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력비에는 해남향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라고 기록되어 있었고요. 고려 충렬왕 때 중국 사신을 해남에서 맞이하게 되어 그 지역에 최초로 향교가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향교 자리는 지금의 해남군 현산면 향교리에 있는데 조선 시대 성조 때 현재 해남읍으로 이전해 왔다고 합니다.

지금의 운동장처럼 커다란 마당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비석들이었습니다. 넓은 마당 오른쪽에 많은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 이 비석은 공적비라고 합니다. 해남 할머니 댁에 내려가는 길이라서 비석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오우가'하면 떠오르는 고산 윤선도 선생님도 이곳 해남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비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해남출신 법정 스님도 이곳 비석에 그 공적이 새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건물은 충효관인데 제가 보기에는 해남향교에서 가장 큰 건물 같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충효관 안에는 우리 학교의 교실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책상과 의자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넓은 강당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위 사진의 건물은 무엇일까요? 무슨 창고 같기도 하죠? 해남향교 사무실이랍니다. 사무실은 현대식으로 건축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옛날식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나 봅니다. 죽 돌아보니 에어컨이 없는 것 같았는데 여름에 덥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딘가 에어컨이 숨겨있기를 바라봅니다.

제가 보기에 해남향교에서 가장 멋진 건물입니다. 여름에는 이곳의 문을 활짝 연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곳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열심히 한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꽤 재미있습니다. 아버지의 한문 실력이 이때 해남향교에서 열심히 배웠기 때문인가 봅니다. 아버지는 수업시간에 절대 졸지 않았다고 강조하시는데요. 확인할 길이 없으니 저는 그저 난감합니다.

 

향교는 고려 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공식적으로 지방 공립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학교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서당을 졸업하면 향교로 진학하는 구조 같았습니다. 해남향교의 입학자격을 보면,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서민의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던 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선 왕조의 교육 목표가 인재 양성과 양민의 교화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주인공 홍길동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당시 신분에 대한 고민을 조금은 덜 하지 않았을까요? 매우 합리적인 제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향교를 졸업해서 소과에 입학하면 당시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옛날같이 공식적인 교육은 하지 않고 주로 제사를 지내거나 유림을 통해 전통 교육행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해마다 수십 명의 유림이 옛날 옷을 입고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선현들께 '춘기 석전대제'라는 유교식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또한, 해남향교에서는 정기적으로 한문교육도 하고 전통 성년식 행사도 하고 예절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이라는 끈을 통해서 '향교'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 같습니다.

향교에서 가장 멋진 건물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이름이 '명륜관'이라고 합니다. 밝은 이치와 도를 가르치는 곳이라는 뜻 같습니다. '학교'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아주 멋지죠?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는 좌·우측에 건물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책을 모아두는 도서관이고요. 다른 한쪽은 공사 중이라서 그 뼈대만 남아 있었습니다.

해남향교의 제일 위쪽에는 '대성전'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유교 선현들의 영정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해 년마다 드리는 제사를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대성전에서 한다고 합니다.

옛날 건물이라 그런지 단청이 매우 예쁘게 그려져 있습니다. 파란색 단청이 정말 예쁘죠? 지금의 현대식 건물에도 우리나라 전통의 단청을 무늬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향교에서는 주로 도덕적인 교육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옛날 향교와 같이 지금의 학교에서도 우리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예와 의'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마다 생활관이라는 곳에서 학생들이 우리의 한복을 입고 어른들께 인사하는 방법이라든지, 어른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의 예절, 차를 마실 때의 예절 등 우리의 전통 예의범절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도 바로 향교의 기능을 이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 시대는 신분사회였는데 원칙적으로는 16세 이상의 양반들 자제만 입학할 수 있었지만, 조선 시대 인재양성 정책에 따라 평민의 자녀도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향교에서의 교육은 그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도 초월했나 봅니다. 앞으로 우리의 교육에서도 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끼를 마음껏 살리고 공부할 좋은 기회를 더욱 많이 만들어서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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