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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교육부 이야기/부모의 지혜 나눔

명량해전에서 만난 이순신 장군

대한민국 교육부 2014. 9. 11. 13:00

명량해전에서 만난 이순신 장군
명량해전 I 이순신 I  장군 | 울돌목 I  명량대첩| 탑 | 사장교


요즘 영화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명량”. 바로 그 배경지를 만나기 위해 전남 해남군 우수영의 울돌목을 찾았습니다. 진도를 가기 위해 진도대교 아래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으로 유명한 그곳 명량해전이 벌어진 그곳입니다. 울돌목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13척의 병선으로 조류를 이용해 왜선 133척을 격퇴함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한 결정적인 계기를 이룩한 곳으로 조선을 구한 명량대첩 전첩지입니다.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부르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르는 곳입니다.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때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이 빠른 급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이한 지형조건의 울돌목은 병법적으로 보면 사지(死地)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런 울돌목의 사지를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해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이 있기 하루 전인 15일에 진을 벽파진에서 전라 우수영으로 옮깁니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사지를 적의 등 뒤에 위치할 수 있도록 해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조선 수군과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신화를 창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바닷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합니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 위로 아치형 진도대교가 위엄을 뽐냅니다. 이 다리는 드센 물살로 교각도 설치할 수 없는 사장교입니다.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의 물살이 회오리쳐 아찔합니다.

울돌목의 바다에서 조국의 위기 앞에 잠 못 이루고 가슴 아파하는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군인의 평상시 복장으로 우수영 바다 위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장엄한 모습과는 달리 평범한 인간의 내음을 느낄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수영 바닷속 주춧돌 위에 세워진 동상은 밀물 때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마치 바다 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는 동상은 13척의 작은 병력으로 왜선 133척을 무찌르기에 앞서 외롭게 고민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한 사전 작전과 전략을 구상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건너편 진도에는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직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참 대조되는 동상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명량대첩 탑은 지난 1990년 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세워진 탑입니다. 1597년 9월 16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휘하의 장병들과 지역 의병들이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여 척을 격파한 세계 해전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승첩(勝捷)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입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침범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길을 내주라고 요구하며 일으킨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입니다. 영화 "명량"속에서는 우리 군인과 왜군이 배 위에서 올라가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배 위에서의 전투는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조선의 군인은 칼은 사용하지 않고 주로 화살과 화포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충무공 유물전시관에는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거북선 실제 모형, 거북선 절개모형, 판옥선 모형, 여러 가지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관 한쪽에는 명량대첩비 탁본이 있습니다. 명량대첩의 승리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80년이 지나 광주 목사 이민서는 명량해전에 감동하여 이 비문을 쓰고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이 비를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일본사람에게는 치욕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200여 명을 동원하여 이 비를 없애려고 했으나,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비는 없애지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 옮겨지게 됩니다. 해방되자, 해남 우수영 사람들이 우리 역사이며, 정신인 이 비를 찾아오기 위해 풍물 걸구질로 돈을 모아 다시 제자리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최초에 세워졌던 해남군 문내면의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순신 장군책임과 과업을 완수하려는 강한 동기와 목표를 가지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거기에 그의 지도력을 지지한 병사와 백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앞장설 줄 알고 끌고 나갈 수 있는 사람. 즉, 리더쉽이 있는 사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열정은 논리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리더쉽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관광지 내 저잣거리 마당에서는 "명량 역사체험마당"을 9. 28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운영되며, 10월에는 명량 대첩 축제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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