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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국인 학교에서 '선생님' 되어가기

대한민국 교육부 2009. 6. 9. 05:23

"선생님은 꼭 나중에 좋은 선생님이 되실 거예요."

 교생선생님 홍지미 기자의 중국의 한국인 학교에서 '선생님' 되어가기 

교과부 블로그기자단의 홍지미 기자는 교육학을 전공한 학생입니다. 지난 4월 중국 산둥성 옌타이시에 있는 연대한국학교에서 20일간의 교생실습을 마치고 돌아왔는데요. 교생선생님 홍지미, 그녀가 낯선 곳에서 느낀 정취와 순수한 아이들과의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통해 '선생님'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실까요?


중국 산둥성 연대(烟台, 옌타이)한국학교 사진 


# 1. 뿌연 공기층 1
햇빛은 뿌연 공기층을 뚫고 환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창가 자리였지만 비행기 밖 하늘 풍경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해 블라인드를 내렸다. 할 일이 없어 옆 사람이 뭐 하고 있나 어깨 너머로 쳐다보았다. 옆에 앉은 삐쩍 마른 중년의 아저씨는 20분 전 인천공항에서 이륙할 때 승무원이 나눠준 입국 사유카드에 무언가 휘갈겨 적고 있었다. 목적지인 산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조그만 도시 옌타이(烟台, 연대)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도 펜을 들고 입국 사유서를 거침없이 적어내려 갔다. 그러다 목적지 란에서 펜을 멈췄다. 연대한국학교를 영어로 뭐라고 써야 하나.

한 달 간 중국 산둥성 연대시 래산구에 위치한 연대한국학교에서 국어과 교생실습을 할 예정으로 옌타이행 비행기에 올라탄 나는 뭐라고 적을 지 한참 고민했다. 집안일로 인해 예정된 일정보다 일주일 늦게 출발한 까닭에 나머지 9명의 고려대학교 교생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사실 카드에 신상 정보를 적는 것은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과 ‘공안’이란 단어가 무서웠던 나는 ‘KOREA SCHOOL IN YANTAI’라고 적어 놓고도 착륙 전 남은 30여 분간 불안감에 떨었다. 그렇게 연대한국학교는 안개 속에 가려져 뚜렷한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감은 연대한국학교를 휘감은 상상속의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새어나와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 공항
공항에 내렸다. 연대한국학교 팻말을 든 조선족 기사는 무척이나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팻말을 보고 다가가자 기사는 나에게 “연대 한국학교?”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족 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족히 30Kg은 넘는 짐을 끙끙대며 끌고 차에 도착했다. 그런데 차에 도착하는 순간 퍼뜩 생각이 났다. 가장 중요한 짐이 든 캐리어를 공항 안쪽에 놓고 온 것이었다. 그곳은 공안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중국어를 한국말보다 능숙하게 하는 조선족 기사의 도움을 받아 짐을 놔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짐을 체크하던 공항 직원은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짐을 가리켰다. 고맙다는 말을 한 후 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공항 직원이 저지하며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What?"을 연달아 내뱉자 공항직원은 어색한 발음으로 “파스 포트”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말귀를 알아들고 여권을 보여준 후 짐을 들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가까스로 가져온 짐을 트렁크에 실은 후 앞좌석에 탔다. 그리고 차는 공항을 빠져나갔다.   


# 뿌연 공기층 2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달리는 중국 도로였다. 8차선 도로가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뻗어 있었다. 오후 2시의 햇빛은 연대시를 뒤덮은 황사 안개 층 사이로 미세하게 스며들었다. 황사 안개는 일주일 넘게 도시를 뒤덮었다. 과연 안개마을(연대의 한국어 풀이) 다웠다. 


# 학교 출근 첫 날


학교 강당 

출근 첫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8차선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던 스쿨버스는 갑자기 좌회전 해 앵두나무 밭 사이에 난 비포장 길을 가로질렀다. 버스는 흙먼지를 풀풀 날렸다. 홈스테이 어머님께서 “5월 즈음 앵두나무 꽃이 피면 예쁘다”고 말했지만 아직 4월 초여서 갈색 가지만 앙상하게 뻗어 있었다. 버스 차창 너머로 빨간색 ‘연대 한국 학교’ 간판을 단 파란 건물이 보였다. 이윽고 도착했다. 차에서 내렸다. 내린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황사 먼지  층과 앵두나무 밭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료냄새가 뒤섞인 미묘한 공기가 콧속을 자극했다. 


운동장 한구석에 짓다가 공사가 중단된 기숙사 건물 

트랙이 깔리지 않은 흙 운동장, 운동장 구석의 골조만 올린 기숙사의 삭막한 모습, 그리고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 가에 세워진 파란색의 학교는 연대한국학교를 감싼 독특한 공기층과 함께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 2. 지평선과 수평선 

날씨가 좋으면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바다가 잘 보인다. 

해질녘의 옌타이 바닷가 

황사 먼지 층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걷혔다. 비가 내린 후였다. 도시를 뒤덮은 황사가 없어지자 수평선과 지평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옌타이는 산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로, 내가 홈스테이 했던 집은 해안가에 세워진 아파트 10층이었다. 아침이 되면 베란다로 수평선 너머 해가 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지평선 너머로 해가 은은히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전북 김제시의 만경평야 뿐이다. 그러나 옌타이에서는 안개만 없다면 어디에서든 지평선과 수평선을 볼 수 있다. 연대한국학교 교사들에게 왜 한국의 공 · 사립 학교에서 교사 생활 잘 하다가 휴직계를 내고 2, 3년 계약직으로 여기에 지원했냐고 물으면 대부분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확실히 어디를 가든 지평선과 수평선을 볼 수 있는 옌타이는 한국보다 훨씬 넓은 곳이었다. 안개만 끼지 않는다면.  


# 3. 순수한 학생들


연 날리는 중국인들. 오후 5시 무렵이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옌타이의 중국인들은 순수하다. 어른들은 저녁 무렵이 되며 바닷가에서 연을 날리며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아이들은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온 동네를 쏘다니며 굴렁쇠를 굴리고, 나무 아래서 딱지치기를 하며 논다. 그래서일까. 한국 아이들도 그런 중국인을 닮아 순수하다. 8학년 1, 2반에서 서동요를 주제로 첫 수업을 할 때 가수 원타임(1TYM)의 노래 ‘One love'를 들려주며 그때나 지금이나 노래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같다고 설명하니 아이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루는 과제를 해 오지 않은 아이에게 벌로 나에게 편지 10줄 이상 쓰기를 시켰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편지를 적어 왔다. 아이는 “선생님은 꼭 나중에 좋은 선생님이 되실 거예요.”라고 힘든 수업에 지쳤던 나를 위로했다.  


연대한국학교 학생들의 중국 체류기간은 제각각이다. 굳이 통계를 내자면 7학년에서 9학년까지는 3 - 5년 정도 중국에 살았던 아이들이 다수다. 10학년에서 12학년까지는 5 - 10년 정도 산 아이들이 많다. 아버지가 대부분 중국에 파견 나온 회사 직원이거나 혹은 개인 사업가다. 대부분 중국 체류 기간을 바탕으로 재외국민 전형에 응시하여 대학에 입학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11학년 1반과 8학년 1반을 대상으로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를 상 · 중 · 하로 나누어 조사해 보았다. 11학년 1반에서 나온 두 개의 ‘하’ 빼고는 모두 중상 이상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1학년 1반이 우중반 중 ‘중’반이라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휴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한번은 내가 담당한 8학년 1반 아이들에게 “얘들아, 월요일에 청명절(중국의 휴일)이어서 토, 일, 월 3일 쉬니까 좋았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다.    


# 4. 마지막 수업 날

복도 창가에서 내다 본 앵두나무 밭

반 아이들과의 단체 사진

우리반 아이들이 칠판에 그려준 그림 앞에서

20여일의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어느새 출국을 모레 앞둔 4월 24일 금요일이 됐다.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 겹겹이 퇴적된 두터운 시간 층이 쏜살같이 훑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다른 교생들보다 일주일 늦게 왔지만 교생실습 삼일 째부터 주당 10시간의 수업을 진행해 온 터였다. 우리 반 아이들 36명 한명 한명에게 정성껏 편지를 썼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종례시간에 편지와 함께 나눠줬다. 그런데 편지를 나눠주는 도중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주는 스쿨버스가 곧 출발한다고 재촉했다. 제대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아이들을 보내야 했다. 아이들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자꾸만 나를 향해 뒤돌아 봤다.

섭섭한 마음을 안고 교무실 옆에 별도로 마련된 교생실로 올라갔다. 여자 교생 몇몇은 이미 울고 있었다. 기분이 도리어 울적해져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복도에 난 창가 너머로 앵두 나무밭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후였다. 잔잔한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하얀 앵두꽃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학교를 뒤덮은 황사 먼지가 걷히고, 삭막했던 앵두나무밭이 아름다워질 무렵에야 베일에 싸였던 학교는 나에게 모습을 보였고, 나는 학교에 마음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는 떠날 때였다. 


# 5.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갈 때의 하늘과 달리 비행기 차창 밖으로 내다 하늘은 맑았다. 문득 폴 매카트니의 노래<Hello Goodbye> 가사가 생각났다. ‘hello hello and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say hello'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말한 마지막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학교에 가는 이유는 나 자신을 알고, 나와 사회를 연결해 줄 언어를 발견하기 위해서야. 그 언어는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 부디 그 언어를 찾아서 머나먼 중국 땅에 있는 아이들이 언젠가는 나와 연결이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이별이 뒤돌아보면 hello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교생 선생님들과 찍은 단체 사진




<<< 홍지미 | 교육과학기술부 대학생 블로그 기자

 e-mail | sky4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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