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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17. 15:22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 7년간의 전쟁 - 임진왜란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일본은 우리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1592년에 시작되어 7년 간 계속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에서도 일본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1592년(임진년) 일본은 거대한 군을 이끌고 부산을 침략하였습니다. 20여 일 남짓한 시간에 거칠 것 없는 모습으로 조선을 공격하여 한양 도성까지 쳐들어왔고,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선조는 궁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20여 일만에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임진왜란 당시 시대적 상황(출처: 에듀넷)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지러웠던 일본을 통일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던 때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했던 힘을 바탕으로 조선은 물론 명나라까지 공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는커녕 신하들이 편을 나누어 서로가 권력을 더 차지하기 위해 애를 썼을 뿐 나라 안팎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심상치 않은 상황에 통신사를 보내어 살피려 했지만 그마저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통신사로 일본을 살피고 돌아왔던 신하들의 입장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와 아니다로 나뉘어졌지만 결국 받아들여진 것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신하들의 입장에서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기에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별다른 준비 없이 일본의 공격을 받은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던 일본에 비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부정적이었던 조선의 무기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일본이 한양을 향해 공격해가는 동안 수많은 조선 백성이 목숨을 잃었고,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내려왔던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지거나 일본에게 강탈당했습니다. 일본은 한양을 점령하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불태웠습니다. 이 같은 7년 동안의 전쟁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이 변화를 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힘을 합쳐 조선을 구한 사람들

임진왜란당시 일본의 공격을 받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선의 군대는 백성을 보호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곳곳에 있던 양반, 승려, 일반 백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서게 됩니다. 그 예로 고경명과 곽재우, 사명당과 서산대사 등이 의병을 일으켜 승리했으며,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권율은 행주성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행주대첩도(출처: 문화재청)


또한 왜군의 무기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들도 속속 등장하게 되는데, 무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백성이었으며 심지어는 천민의 신분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양반부터 천민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땅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왜군을 물리치려 노력하는 동안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왜군은 바다를 통해 전쟁에 필요한 물품과 군대를 들여와야 했고 이를 잘 알고 있던 이순신은 거북선과 판옥선을 만들어 왜군과 싸웠습니다. 옥포에서의 첫 승리를 시작으로 23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면서 왜군의 보급로를 막아 결국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났고, 조선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교류

외교 사절단인 조선 통신사는 나라 내부의 상황을 살피고 양국의 교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더 이상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끊은 것입니다. 이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였고, 일본의 지속적인 요청에 조선은 1607년 다시 일본과의 교류를 시작하며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조선 통신사는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선 통신사가 오고갈 때마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문화가 유행하였습니다. 일본보다 수준 높았던 조선의 문화는 일본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기에 통신사 일행이 조선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에도에 도착하는 동안 일본 각 지역의 지식인들은 앞 다투어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글과 그림을 부탁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는 조선 시대 ‘한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선통신사는 조선말까지 십 여 차례에 걸쳐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조선 통신사가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과는 달리 일본이 조선에 보내는 사절단은 임진왜란 전과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일본 사신단은 임진왜란 전에 한양으로 올라와서 교역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한양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부산에서 교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였던 일본과의 관계는 이렇게 지속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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