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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로 살펴본 조선 사람들의 생활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28. 10:22


풍속화로 살펴본 

조선 사람들의 생활 



■ 풍속화란?

풍속화란 그 시대의 생활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를 통해 그 시대의 옷이나 놀이 등의 생활상을 알 수 있죠. 예시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 신석기 시대 한반도의 바다에 다양한 고래가 살았으며 고래를 잡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주는 풍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져 있는 농사 짓는 모습은 초기 철기 시대 농사가 그들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출처: 문화재청)


오래 된 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도 풍속화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말 위에 올라타서 활을 쏘며 사냥 하는 고구려인의 모습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용맹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또한 같은 무덤 안의 무용도는 고구려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떠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용총에서 나온 그림들(왼쪽: 무용총 수렵도, 오른쪽: 무용총 무용도)


이러한 풍속화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지는 않았겠지요? 서양의 풍속화의 경우 약 5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 서양의 그림은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표현하거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를 그리는 등 생활 속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상상하여 표현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화가들 사이에서 자신이나 주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사실주의가 시작되면서 그림의 소재가 주변의 생활모습으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피터 브뤼겔 '아이들의 놀이'



■ 서민의 생활모습을 담은 김홍도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풍속화라 불리는 그림이 시작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입니다. 영·정조시대 나라가 안정되면서 조선은 문화적으로도 크게 성장했고, 이때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과 같은 뛰어난 화원이 등장하면서 우리나라의 풍속화는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서민의 생활모습을 풍속화로 담았던 김홍도는 정조시대의 천재 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중인 출신이라 알려진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그림을 담당하는 기구인 도화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김홍도는 풍속화 뿐 아니라 산수화, 초상화, 풍속화 등 거의 모든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재능은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린 것에서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어진은 임금의 초상화를 말하는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겐 매우 큰 명예였습니다. 한 명의 화원이 임금 한 사람의 어진을 그리는 것도 영광이라 할 수 있었는데 영조에 이어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것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의 실력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정조의 어진에서 의궤까지 자신의 재능을 뽐냈던 김홍도는 다양한 선비들과 교류를 통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인물 중심의 풍속화를 그리게 됐습니다. 사람의 마음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김홍도의 풍속화 속 인물의 표정은 매우 생생합니다. 타작을 하는 사람들, 씨름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 서당에서 혼나는 아이의 표정 등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일상과 표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길쌈, 대장간 등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였고, 어떤 놀이를 즐겼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시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을 주인공으로 풍속화를 남긴 것입니다.

 

 

■ 금기를 깬 신윤복

조선의 풍속화를 이야기할 때 김홍도와 함께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신윤복입니다. 하지만 김홍도와는 그림의 소재나 그리는 방식 등에는 많은 차이가 나는데요.

 

조선 시대는 유교적인 원리가 백성의 생활까지 지배했던 나라로 유교의 원리에 따라 관혼상제나 생활 방식이 정해지고 그를 따라야했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그리는 방법이 정해져 있었으며 그것은 대체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중국의 방식에서 벗어난 그림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자유로운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특히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대놓고 그리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신윤복은 그러한 금기를 깨는 자유로운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홍도가 일반적인 백성의 삶을 그림에 담았다면 신윤복이 흥미롭게 보던 대상은 기생이나 무당 등 여자의 삶이었습니다. 또한 그리는 방법도 김홍도의 남성적인 선에 비하여 매우 섬세하고 정교합니다. 예로 미인도에 그려진 여인의 머리카락을 보면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윤복의 미인도 중(출처: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신윤복의 자유로운 작품 세계는 다른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색채의 사용에서도 드러납니다.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선명한 색상은 당시 화가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색이었습니다. 유교적 원리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는 그림에서도 기품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단정함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색을 쓰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따라서 먹의 진함과 연함, 화려하지 않은 한두 가지의 색이 그림에 허용되는 색이었다면 신윤복은 과감히 그 틀을 깨고 화려한 색으로 그 당시 옷이나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또한 신윤복은 섬세하면서도 여성적인 그림 속에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점잖은 척 하면서도 늦은 밤 여인을 불러내어 노는 모습, 상중임에도 기생을 불러 노는 모습, 뇌물을 받는 관리의 모습 등 양반의 이중성을 꼬집어 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그 당시 사회의 변화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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