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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배운 역사, 사육신공원을 찾아서

대한민국 교육부 2017. 8. 7. 14:55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

사육신공원을 찾아서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서는 군자의 삼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得天下英才而 敎育之 三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교육(敎育)은 바로 이 세 번째인 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得天下英才而 敎育之 三樂也)’에서 따온 말입니다.

 

학교에 다니면 여러 교과목을 배웁니다. 국어, 사회, 수학, 국사 등. 각 교과목은 민주시민으로 살아갈 역량을 배양해 주는 요소입니다. 교과서에서도 학문을 배우고 익힐 수 있지만, 현장에서 배우는 교육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더욱 더 밀접하게 다가옵니다. 특히나, 역사의 경우에는 동시대가 아닌 지난 시간의 기록을 배우기에 현장감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박물관 견학, 미디어를 활용한 역사교육, 고적지 탐방 등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현장이 서울에 많습니다. 이 중 서울 노량진은 한양의 관문이었던 노들나루,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모신 국립현충원, 양녕대군이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점이었던 노량진역 등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사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공원을 찾았습니다.

 


 

 

사육신(死六臣)이란 한자에서 보듯이 사육신공원은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신하들을 모신 곳입니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났습니다. 사육신이라고 불린 신하들은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숨진 충신들입니다. 역사 교과에는 수양대군의 왕권 찬탈과 사육신에 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남을 속이고 이러 저리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입장을 바꾸는 간신배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사육신 역사관 안에도 충신불사이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육신묘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습니다.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묘는 허묘(풀에 묻혀 폐허가 된 묘)입니다. 사육신인데 왜 일곱 사람의 묘가 있는지 궁금하시죠? 독자 여러분과 함께 사육신 공원에 온 것처럼 천천히 둘러보며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육신역사관 1층에는 동작구 홍보관이 있고, 2층에는 사육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충신들의 이야기, 시대적 배경 및 연표, 감옥 체험실, 충신들의 복권과정 등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육신역사관 2층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 등 7명의 충신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란 글귀가 있었습니다.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였다고 합니다. 집현전 학사였기에 세종에게 신임을 받았겠죠? 세종 이후 왕위에 오른 문종은 어린 세자였던 단종을 도와달라고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을 비롯한 원로대신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원로대신은 기력이 쇠했고, 젊은 학사들은 벼슬이 낮아 국사를 주도할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영화 관상에서도 수양대군의 권력야심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수양대군은 자신의 조카였던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왕좌에 오릅니다.

 

 


 


 

 

단종의 복위를 준비하던 신하들은 심문을 받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합니다. 멸문지화는 삼족을 멸하는 벌이었습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이 있을 때 한 가문을 없애는 형벌이었습니다.

 

사육신역사관에서는 성삼문과 박팽년의 심문에 대한 글이 있고, 충신들에게 행해진 고문을 체험하는 감옥 체험실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의 체험 시설에 불과하지만, 당시 사육신에 대한 가혹한 고문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기념사진으로 남기기엔 어딘가 아픈 구석이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꼭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 바로가기: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이제 사육신공원에 왜 7분의 충신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육신을 말하려면, 생육신(生六臣)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생육신이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린 신하들입니다. 김시습, 원호, 성담수, 남효온, 이맹전, 조려입니다. 이 중 남효온이 집필한 육신전(六臣傳)에 상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여섯 신대를 기록했습니다. 이때부터 사육신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이후 정조는 육종영, 삼상신, 사의척, 삼중신 등 사육신 외에 단종 복위에 힘쓴 신하들을 공인했습니다. 사육신묘에 있는 김문기는 삼중신에 해당합니다.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이란 말도 종종 쓰이곤 합니다. 어떻게 불리건 의롭지 못한 반정에 충절을 지킨 신하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육신이 복권된 이유도 사육신의 충절이 후대에 인정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정이 불합리함을 깨달았던 것이죠.


 

 

사육신역사관을 나와 잠시 사육신공원을 둘러봤습니다. 한강이 보이고 지하철이 지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옛날 이곳은 한양의 관문이었던 노들나루터였습니다. 지금은 노들나루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역사의 장소에 가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입니다. 글로만 배우는 역사 공부보다 당시를 기록했던 공원, 박물관, 사적지를 방문하는 것이 현장감 있는 역사공부가 될 것입니다. 교과서에서만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산책으로 직접 선인들을 만나며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사육신공원. 꼭 한 번 다녀오시길 추천 드립니다.




2017 교육부 블로그 기자단 / 김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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