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파브르 위대한 과학자 석주명
지난 11일에 막을 내린 '부활 더 골든 데이지 공연'은 한국의 파브르 위대한 과학자 석주명을 일대기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이었습니다. 일본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나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은 석주명 박사의 삶에 ‘지하도시’라는 초현실적인 판타지 효소를 가미하여 한국형 창작뮤지컬의 장점을 살려내었다는 기사 평을 보았습니다. 뮤지컬을 못 본 아쉬움 속에서 나비 박사 석주명에 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나비 박사 석주명은 생전에 “우리 대한민국이 발전하려면 어린 새싹들에 과학정신을 심어주고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를 갖도록 이끌어 주면서 탐구정신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한 자연과학의 중요성과 함께 과학 꿈나무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석주명 선생님의 뜻이 이루어져 우리나라의 자연과학 분야도 계속된 발전을 한 것 같습니다.
나비와 꽃에 관한 연구는 인류가 생긴 뒤 가장 먼저 발달한 학문입니다. 또한, 훨훨 나는 나비를 바라보면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됩니다. 나비는 사람들의 정서 생활을 도와주는 아름다운 곤충입니다. 석주명은 우리나라 온 땅을 돌아다니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하여 우리나라에 총 250여 종의 나비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일생 그의 손을 거쳐 간 국내외의 나비는 무려 75만 마리나 됩니다.
한국의 파브르, 나비 박사의 꿈을 가지다
한국의 파브르 나비 박사 위대한 과학자 석주명, 그의 뜻깊은 나비 인생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나비를 연구하고자 꿈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석주명이 처음에 가진 꿈은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하기 위한 과학적인 농업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일제치하의 시대를 살면서 힘없는 나라를 가진 백성의 아픔을 절실히 깨달은 그는 조선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축산업을 해서 낙농을 일으켜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석주명은 2학년이 올라가면서 농학과에서 박물과로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그 이유는 축산선생님의 성의 없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더 훌륭한 가르침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 과를 옮기게 되었고 이것이 나비 박사가 될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석주명이 훌륭한 축산선생님을 만났다면 그는 우리나라 낙농업계의 대들보가 되어있지 않았을까요? 무엇이든 한 번 하면 그 일에 파고들어 온 힘을 기울이는 근성으로 과학적인 낙농업 분야를 개척하여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의 파브르 나비 박사는 탄생하지 못했겠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석주명이 나비 박사의 길을 가도록 열어준 분은 박물학과의 한 교수님이었습니다. 석주명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일이 자네에게 가장 맞는 일일 것 같네. 한 십 년만 조선 나비를 연구하면 자넨 조선 나비에게 관한 세계 제일의 학자가 될 수 있을 걸세.”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석주명은 마침내 나비연구의 험난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 나비 60만마리를 태우기전 기념사진. 제일 오른쪽이 석주명 / 이미지 출처: 석주선기념박물관>
생명의 소중함
석주명은 나비연구에 더 전념하기 위해 송도 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면서 그동안 수집한 나비표본을 옮길만한 곳이 없어서 태우기로 하였습니다. 나비표본을 태우기에 앞서 그는 일만여 개씩의 표본이 담긴 상자 60개를 박물관마당에 꺼내놓고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간단하게 나비 위령제를 지내주었습니다. 석주명의 학문을 위해서 희생된 나비도 생명체로 인정하였습니다. 나비표본 60만 마리가 다 타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는 생명을 갖고 태어난 나비 한 마리 한 마리를 자기 몸과 같이 소중하게 여겼으며 나비 연구를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채집만을 하였습니다. 또한,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그는 온몸에 비를 다 맞으면서 채집한 나비를 더 소중히 여겨 채집통에 있는 나비에게 우산을 씌어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호기심 속에서 싹튼 생물학 지식
석주명은 어릴 적 비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가 기르는 비둘기 중에는 이마에 검은 점이 있는 비둘기, 꼬리만 검은색인 비둘기, 온몸은 까만데 꼬리만 흰 비둘기, 몸 전체는 흰색인데 등 양쪽에 검은 무늬가 있는 비둘기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가 있었습니다. 석주명은 비둘기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문선, 선디, 광대…. 등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흰 놈끼리 짝지어주면 대개는 흰 놈이 나오는데 까만색이 나오고, 검은색 비둘기끼리 짝지어주어도 흰색 비둘기 새끼가 태어나는 걸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흰색과 검은색의 비둘기를 같이 살게 하였더니 붉은색이 도는 새끼가 태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면서 석주명은 자신도 모르게 생물학에서 배우는 유전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깨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 중 하나가 비둘기 짝짓기에 대해선 거의 전문가라 할 만큼 많은 경험이 있어서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계속 비둘기 짝짓기 실험을 하였습니다.
'꼬리가 까만 놈과 등이 까만 놈을 짝지으면 어떤 색을 한 놈이 나올까? '
'이마에 점이 있는 놈과 없는 놈을 짝지어주면 점박이는 몇 마리나 나올까? '
이렇게 비둘기를 통해 생물학의 유전자 지식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황소를 팔아서 어머니가 사주신 영문타자기/유물소장처: 석주선기념박물관>
<송도고보의 실험실에서 나비표본을 살피는 석주명 /이미지 출처: 석주선기념박물관 >
나비박사의 도전과 업적
석주명은 영국왕립학회에서 논문 의뢰를 받았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영문타자기가 필요하였지만, 그때 당시 영문타자기는 황소 한 마리 값이어서 영문타자기를 가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도 그의 어머니는 영문타자기를 사주셨고 석주명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아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4개월 넘게 나비와 씨름하며 어머니가 사주신 영문타자기로 그는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완성하였습니다.
‘조선산 나비 총목록’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1940년 이 책의 공로를 인정받아 석주명은 세계에서 서른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 회원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석주명은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나비의 잃어버린 우리말 이름을 모두 찾아주었고, 이제는 그 주소를 찾기 위한 새로운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나비분포지도를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총 248종이나 되는 우리나라 나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나비 분포 지도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지도와 세계지도를 각각 250장씩 준비하여 나비 한 종류에 지도 한 장씩을 사용해서 그 나비가 사는 곳에 붉은 점을 찍었습니다. 그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과 최남단 마라도까지 돌아다녔으며 일본, 몽골, 사할린, 만주와 대만까지 다녀왔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38선을 경계로 남방부전나비는 이남에만 살고 이북에는 큰주홍부전나비가 살고 있으며 신기하게도 남방부전나비는 파랗고 큰주홍부전나비는 빨갛다는 것입니다. 남방부전나비를 볼 때면 이러한 신기한 사실을 주변에 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석주명은 과학 연구에 목적을 두고 과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생물 가운데 나비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석주명은 세계의 어떤 과학자보다 우리나라의 나비를 잘 아는 세계적인 학자였습니다.
석주명은 일본강점기를 살면서 일본 학자들이 마구잡이로 붙여놓은 일본 이름 대신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때는 나비가 모두 일본 말이었기 때문에 석주명이 붙여준 나비 이름이 더 뜻깊습니다. 그는 나비에게 굴뚝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온통 검은색이라 ‘굴뚝나비’, 날개가 투명해서 ‘유리창나비’, 날갯짓이 심해서 ‘떠들썩 팔랑나비’라고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나비 박사, 나비로 부활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석주명은 연구실에서 나비 지도 500장과 타자기를 가지고 나와서 동생의 집에서 ‘우리나라 나비 분포도’를 거의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국립과학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과학관) 연구실이 불타면서 수많은 나비표본도 불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석주명이 그토록 아끼던 15만 마리의 표본과 자료들, 그리고 논문은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석주명은 큰 슬픔과 충격을 받았으나 아픔을 딛고 나비 연구를 위해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의 다짐을 합니다. 1950년 10월 6일 그는 국립과학박물관을 다시 세우기 위한 회의에 가려고 집을 나서 가던 중에 술 취한 청년이 쏜 총알을 맞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80년생을 살 것으로 생각하고 인생을 준비하던 그에게 너무나 뜻밖에 죽음이었습니다.
1955년 일본 곤충학자 시로즈는 자신이 처음 발견한 나비를 학계에 발표하면서 학명을 헤스티나 자포니카 석키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보통 나비 학명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석키는 석주명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학자는 석주명 선생의 나비에 대한 열정은 나라를 뛰어넘어 본받을만하며 나비의 이름 속에 남아 언제까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석주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석물결나비’라는 나비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파브르 위대한 과학자 석주명은 나비로 부활하여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입니다.
<석주명 가족사진/이미지 출처: 석주선기념박물관>
나비 박사 석주명의 가르침
“여러분도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매달려 보십시오.”
석주명은 자기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꼭 한 분야를 십 년만 죽으라 하고 파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도 남이 잘 하지 않는 일을 골라서 그렇게 하면 반드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알렸습니다. 또한, 석주명은 수업시간에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에 대해 늘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자기 자신이 마음속으로 파브르를 가장 존경하였기 때문이겠지요.
파브르와 석주명 사이엔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둘 다 대학교수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정도에 해당하는 학교 교사로서 남이 하지 않은 분야를 평생 연구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을뿐더러 각자 자기 민족의 자존심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파브르 위대한 과학자 석주명에게 우리가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일을 골라서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매달려서 온 힘을 기울였고,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며 한 가지 일을 이룬 후에는 또 다른 새로운 일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