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침략과 고려의 저항
몽골의 침략과 고려의 저항
■ 무신정권의 등장
무신정권은 1170년(명종 1년) 무신이었던 정중부의 난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고려 사회는 문신 중심의 정치를 해 나가며 무신들을 푸대접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무신정변은 고려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신정변 결과 고려사회는 새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이 성립되게 됩니다. 무신정권은 약 백 년간 계속되었는데 무신들은 백성이나 나라 걱정보다는 본인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권력을 독점하여 고려사회는 점점 어려워져 가게 되었습니다.
▲ 무신정권의 계보(출처: 에듀넷)
■ 약해진 고려의 국력, 몽골의 침략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시기는 바로 고려시대 무신정권기였습니다.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몽골인들은 곧 고려 땅을 넘보며 침략 해 왔습니다. 당시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최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몽골의 침입에 항전했지만 결국 무신정권도 무너지고 몽골과 화친도 하게 되었습니다.
▲ 몽골의 세력(출처: 에듀넷)
■ 민초들과 삼별초의 항쟁
고려 집권층들은 비교적 쉽게 몽골에 항복하였지만 민중들은 달랐습니다.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칠 줄 모르는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장렬히 전사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군도 몽골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며 원나라(몽골)와 끝까지 싸움을 전개하였습니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3개 부대의 총칭으로 원래 도성을 지키고 임금을 보호하는 친위대의 기능을 하였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에는 강화도 수비를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의 대몽 항쟁 과정에서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후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마지막까지 몽골에 맞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삼별초군이 이처럼 마지막까지 대몽 항쟁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민중들의 지지와 투쟁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삼별초의 항쟁(출처: 에듀넷)
■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 '몽골풍'의 등장
삼별초군이 완전히 평정된 후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화친을 맺게 됩니다. 부마국이란 사위의 나라가 된다는 뜻으로 고려의 왕이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고려는 과거 황제의 나라에서 이제는 신하의 나라(제후국)가 되어 각 벼슬의 이름이 낮추어지게 됩니다. 왕의 이름에 충렬왕, 충혜왕, 충정왕 등 ‘충성 충(忠)’ 자를 넣어 쓰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원나라의 문물이나 풍습이 고려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이를 몽골풍이라고 합니다. 몽골풍은 주로 고려의 상류사회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몽골어, 몽골식 이름, 몽골식 복장, 변발 등이 있습니다. 상류층의 지배 계층 사람들이 앞장서서 몽골풍을 따랐다는 사실은 창피한 일이었지요. 또한 두루마기를 입는 것, 만두, 소주 등의 음식, 결혼을 하는 신부가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머리에 족두리를 하는 것도 몽골에서 건너온 풍속입니다.
▲ 몽골식 의복과 변발(출처: 에듀넷)
▲ 연지곤지(출처: 에듀넷)
▲ 족두리(출처: 에듀넷)
이 외에도 몽골에서 공녀라고 해서 어린 여자들을 원으로 끌고 가곤 했기 때문에 고려에는 일찍 결혼을 시키는 조혼의 풍속이 생겨나게 됩니다.
▲ 원나라로 끌려가던 처녀들, '공녀'(출처: 에듀넷)
삼별초의 항쟁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정치적 관리하에서 지내게 됩니다. 백성들의 안전이나 나라의 안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좇았던 무신 정권과 비교하여 삼별초군을 비롯하여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 애쓰다 죽어간 민중들이 모습이 참으로 달랐던 것을 생각하며 나라 사랑의 마음을 굳게 가져야겠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