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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민서포터즈

일본이 먼저 알아본 국악계의 보아, 꽃별

대한민국 교육부 2011. 5. 31. 07:00



'국악계의 보아'라는 해금 연주가 '꽃별'의 어머니를 인터뷰했다. 꽃별(30세,본명,이꽃별)의 어머니 김민화(60세)씨는 나와 대학 동기 동창이다. 그래서 더 심도 깊은 인터뷰를 할 수가 있었다.
 
꽃별이 뉴에이지 음악가로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 일본에서부터였다. 2003년 일본에서 첫 앨범을 낸 뒤 국내에서도 잇달아 앨범을 내놨다. 한국 해금연주자가 현지에서 일으킨 붐은 생각보다 컸다. 중국의 얼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해금을 일본 대중에게 알린 주인공이기도 했다.
 

* 꽃별 5집 '숲의 시간 ' 표지 사진

 
몽고의 마두금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금은 미처 일본까지는 닿지 않은 악기였다. 얼후는 철현(鐵絃)에 뱀가죽을 울림판으로 쓰지만 해금은 명주실에 나무로 된 울림판을 사용한다. 일본의 유일한 찰현악기 ‘고큐’가 있지만 줄의 개수도, 음색도 완전히 다르다
 

 
해금은 기타, 첼로,거문고,피아노, 리코더 등의 악기와 만나 환상의 소리를 만든다. “해금은 어느 악기와도 색을 맞춥니다. 공중에 떠 있는 현을 일정한 지판 없이 주물러 내는 소리이기에, 절대음을 지향하지도 않아요. 음이 나가버린 망가진 피아노에도, 아프리카 토착음악의 이상한 음계에도 잘 어울립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꽃별'이 한 말이다.
 

* 다음 통합검색, '꽃별' 프로필.

 
꽃별은 일본 공연에서 에너지 넘치는 퓨전 국악곡을 연주했는데, 무대에 설치된 모니터 스피커를 밟고 마치 록음악처럼 터프하게 연주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기획사가 일본 활동을 권유해 일본에서 데뷔하게 됐다
 
나는 '꽃별'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며 가정교육의 독특한 방법이 한 예술가를 만들었다고 확신하게 됐다. '꽃별'이 대단한 것은 자작곡도 많고 드라마 '추노'의 OST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비인기 종목이고 보조 악기였던 해금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킨 공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꽃별'의 어머니에게 질문한 내용입니다. (친구라도 공적인 질문이라서 존칭으로 바꾸었습니다)
 
 

Q1
이름을 '꽃별'이라고 지은 사연이 있나요?


 김민화  꽃별이를 낳을 때 아빠(이기용,61세)가 출장 중이었는데 하늘엔 별이 가득 빛나고 땅에는 수많은 예쁜 꽃들이 핀 꿈을 꾸고 딸을 낳으면 '꽃별'이라고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꽃별이 어머니 김민화(60세)씨,미소가 딸인 '꽃별'과 똑같았다.

 
 
 

Q2
꽃별이 아빠가 건설회사에 다녀서 지방에서 오래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꽃별'이 몇학년까지 지방에 살았나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거제도와 경북 안동에 살았어요. 전학을 모두 4번을 다녔는데 '꽃별'이가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과 친구들이 좋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전학가면 잘 적응하고 다음학기에는 학급 임원에 선출되곤 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서울로 이사와서 죽 살았어요.
 

*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덕수궁에서

 

Q3
두딸을 키우며 가정교육 중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두 딸에게 보석같이 생각한다고 자주 말해 주었어요. 두 아이가 좋은 성품의 행복한 사람이 되길 소망했습니다. 온가족이 아빠가 전근 간 시골 마을로 모두 함께 다닌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가족은 함께 살며 늘 대화로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4
가족여행을 무척 많이 다닌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다녔고 , 여행의 효과는 딸들의 정서에 어떻게 나타났나요?

 
여행은 다 세기도 힘들만큼. 많이 다녔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83년~86년), 거제도에 살았는데, 그주변 -충무,한산도 제승당, 경주, 마산, 광주무등산, 여수, 해금강, 그리고 주말 마다, 거제도 탐사 . 하다 못해 집에서 가까운 저수지. 서울에 이사와서는 구룡령, 설악산(여기는 총10회이상 같어요) 어린이 대공원, 강화도, 문산 장흥(일영)다시 안동에서3년(88~91.2)-도산서원 하회마을 청량산 주왕산 진주 부석사 봉정사 등 안동 주변을 다돌았어요. 대구근처도. 주말이면 꽃별이 친구들 까지 대리고 안동땜에 있는 마을에 가서 놀고, 낙동강가 에서 벗꽃놀이도 하고 다시 서울에와서 전라도 서원들을 돌아보고, 전주에도 가고, 부여에서 백제문화권도 돌아봤어요. 삼척 부산... 용평, 등에 스키를 타러 가기도했고, 별 보러 용평 오지에 갔던 일도 있어요. 어느땐 가면서 차 안에서 서로 칭찬하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 가면 기분도 좋아지고, 아 그럴 때 이 사람은 감동을 받았구나 하는 깨달음도 생기고...아무튼 제주도도 5번쯤 갔으니, 우리 나라에서 안가 본 곳이 없을 듯합니다.
 해외는 4명이 간 곳은 세부, 방콕 ,앙코르왓트, 삿뽀루, 오타루. 3명이 간 곳은 도꾜, 후라노(홋카이도) 홍콩등 주로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 다녔어요.
 

* 어린 두 딸과 강원도 오지마을로 여행을 갔을 때

 
여행은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 그리고 나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인 것 같아요. 산,들에 가서 나무잎과 숲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생명들을 보면 친근해지고 사랑도 생기지요. 집 가까이에 있는 저수지, 낮은 언덕, 해송이 아름다운 바닷가 그런 곳에서 어릴 적에는 애들과 놀았어요.그러다가 한국인의 자존감을 심어주고 싶어서, 유적이있는 곳을 다녔고, 별을 보러 다니기도 했어요. 가까이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재미도 있어요. 우리 애들은 유난히 하늘이 맑은 날이나, 노을이 아름다운 날에는 나에게 전화를 해요. 창밖을 보라고.
 
 

Q5
사교육은 악기만 시킨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엄마가 과학교사였으니까 공부 지도를 직접했나요?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서 국어는 한국인의 언어이니 잘 알아야 하고 사물을 이해 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어요. 수학은 논리적인 사고를 키워주는 중요한 과목이고, 사회는 지방으로 여행다니며 세상을 알게 해주었고,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살아 온 배경과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어요. 제가 강조한 것은 "노력하지 않고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도둑놈 마음이다"라고 한거지요.
 

 
 

Q6
'꽃별'이 해금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동에 살 때 꽃별이가 안동 KBS 어린이 합창단이었어요. 노래를 잘 했지요. 우연히 국악공연을 보러 데리고 갔는데 그때 국악을 눈여겨 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4년간 배웠고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풀륫을 배웠어요. 국립국악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중2 때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중3 선배가 하는 해금소리에 반해서 전공으로 정했어요.
 
 

* 중학교 때의 꽃별의 모습 ,늘 밝은 미소가 곱다.


 

Q7
꽃별을 키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떨어진 일입니다. 그때 국악고 선생님 중에 꽃별이는 국악으로 대성할 애라고 용기를 주었어요. 재수를 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국립)' 에 입학을 했어요. 그때 실패를 해봐서 남의 입장도 알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Q8
혹시 대학교수님에게 사사를 받은 적은 있나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교육받은 것과 서울대 국악과 학생에게 레슨을 받은 게 전부입니다. 대학교에 가서 그 대학교 교수님에세 강의 시간에 배웠습니다. 학사, 전문사(대학원) 를 마쳤습니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홈페이지 '2009 학교를 빛낸 동문'으로 선정된 '꽃별'

 
 

Q9
집안에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 더 있으신가요?


전공한 사람은 더 없어요. 그러나 둘째 아주버님 그리고 3째 아주버님과 꽃별이 작은 아빠가 음악을 아주 좋아해요. 아빠 집안의 예술가의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왼쪽에서 두번째 부터 꽃별의 아빠와 엄마

 

Q10
일본에서 데뷔했는데 꽃별이 활동할 때 부모가 해준 일은 무엇인지? 얼마나 자주 만났나요?


갑자기 제의가 들어와서 고민 끝에 음반을 내기로 하고, 계약서를 철저히 썼어요. 계약서 내용은 누가봐도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내용이 많았지요, 그래서 수입 부분은 그 사람이 쓴 것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꽃별이가 학생임을 잊지않게, 학업에 지장을 주지않토록 했지요. 꽃별이가 학기 때는 잠시 일본에 갔고, 방학 때는 방학 끝날 때까지 있었어요. 그때 내가 한 일은 매일 저녁에 전화 한 일이였어요. 그후에 꽃별이가 그러더군요. 한국사람 만나면, 일본어도 빨리 늘지 않고, 아까운 시간 허비할까 봐 아무도 만나지 않았는데 엄마와 한국말 하는 것이 참 좋았다고...


Q11
자녀에게 국악을 전공 시키고 싶은 학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요?


우선 많은 기회(책,여행, 공연관람, 미술관람, 고궁탐방, 부모와의 대화등)를 주어서 하고 싶은 것이 생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중 국악을 선택 하는 학생은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을 갖게 하고,예술에 대한 인식,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느 분야, 어느 악기가 자신과 잘 맞는지, 이런 것들을 살피라고 하고 싶어요. 사람도 일도 사랑과 정성 없이는 이룰 수 있는게 없다고 나는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성의있는 시간을 쏟아부어야 좋은 결과를 만날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다림이지요. 은근과 끈기을 부모도 아이도 가져야 합니다.
  

 

Q12
지난 번에 두 딸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잠시 대화 했는데 어떤 사위감이면 좋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 큰 아이는 음악을 이해해 주면 좋겠고, 작은 아이는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사람. 건강하고(몸과 마음), 성실하고, 따뜻하고, 치우치지 않는 사람. 내 바람이지요, 그냥 아이들이 좋다고 하면 대충 나도 좋아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Q13
둘째 딸(이다은 28세,고려대학교 간호학과 졸)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다은인 일본 제약회사에 다녀요. 그 중에 그약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사람에게 어필 할건지 하는 일을 만드는 분야입니다. 우리 애들은 어버이 날이면 우리에게 편지를 써주는데, 거기 이런 말이 .... 내가 늘 지금 하는 일이 내게 더 맞고,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늘 긍정적으로 사는 아빠를 닮아서 일거야. 늘 꼬마라고 여겼는데, 회사에서 인정받고, 아래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무엇에든 시간을 들여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고맙고 대견하지요. 지금은 중국에 출장 중.수요일에 옵니다. .
 


Q14
앞으로 꽃별이 연주자로서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요?

 
꽃별이도 그렇지만 나도, 목숨 걸고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한국의 아름다운 음악을 세계에 알리면 좋겠지만, 지가 해금하는 일이 행복하고 좋을 때까지 하길 바래요. 그리고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면 좋고, 여자로서는 나처럼 남편 때문에 행복하고, 자녀 때문에 행복한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Q15
두 딸들이 수입의 일정액을 늘 기부한다고 들었는데?

 
꽃별인 대학교때 부터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를 했고(그때로서는 제 용돈에 비해 참 많이), 다은인 직장 생활을 할 때부터 자신의 수입의 거의 10분의1을 기부하고 있어요..
요새는 제법 월급이 많아져서, 여러군데 하더라구요. 애들이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범 세계적으로 여행을 다녔어요. 해외도 지들끼리 인도 네팔 유럽 여러나라도 다녀왔어요. 스페인 순례자의 길도 다녀오고, 파울로코엘료의 책을 보고 몹시 가고 싶어하더니 갔다왔어요.

  

Q16
꽃별이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300인의 문화 예술 명예교사"에 된 것을 축하합니다. 어떤 분들이 주로 선정됐어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소설가 김훈씨, 성악가 조수미씨등이라고 들었어요. 

 
나는 대학재학시절에는 김민화와 친하지가 않았다. 실험조가 다르고 서로 절친한 멤버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산에 살 때 남편의 직장 때문에 내려온 동창 김선영과 2년을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됐다. 김선영과 민화는 절친이었다.
 
선영이는 늘 민화는 참 좋은 친구, 단점을 별로 못 느끼는 친구라고 했었다. 우리 사회에는 10%의 좋은 사람과 10%의 나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80%의 보통 사람들이 그 10%의 좋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배우고 친해지려고 한다는데 ....... 내 친구 김민화는 참 좋은 인생을 살았고, 행복한 여성이다. 그친구의 딸 '꽃별'이 꽃처럼 고운 예술가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는 김민화가 내 동기 동창이어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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