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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민서포터즈

우리 민족의 근, 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 독립정신을 배워보아요.

대한민국 교육부 2016. 7. 11. 19:22
우리 민족의 근, 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 독립정신을 배워보아요.
 

 

저는 오늘 우리 민족의 근, 현대사와 선열들의 자주 독립정신을 배워보고 싶어 가족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정확한 관람안내는 밑에 있는 사진에 나와 있습니다. 잘못하고 휴관 일에 가서 역사관의 내부도 못 보고 갈 수 있으니 관람안내 사진을 꼭 보시고 가시길 바랍니다.
 

 

 

<출처-직접촬영,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관람안내>

내부는 3·1 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중앙사, 민족 저항실, 감시탑, 지하 고문실, 옥사 7개동, 형무소 역사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출처-직접 촬영,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구조> 

이제 본격적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대해 알아볼까요?
 

 

 

<출처-직접촬영,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지어진 감옥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탄압을 위한 기관이었습니다. 이 서대문형무소가 자리한 서대 문고 현저동 일대는 전엔 한양에서 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자 종착지였습니다. 따라서 중국과 조선의 사신과 상인이 오가면서 국제 교역로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모화관이 세워졌습니다. 이 영은문이 없어진 자리에 1897년 독립협회의 주도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표방하여 독립문이 세워졌고,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바뀌어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전차가 다니게 되면서 서대문은 사람들의 왕래가 더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감옥을 세웠을까요? 그 이유는 서대문이 당시 정치와 교통의 중심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억압과 공포의 상징인 감옥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일본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정말 너무하죠?
 

 

 

<출처-직접촬영, 형무소의 설립>

1908년 서대문 현저동에 서대문 형무소가 들어설 당시의 이름은 ‘경성감옥’이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사실상 주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의병 전쟁,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같은 항일 조직 결성 등으로 항거했습니다. 무엇보다 의병 전쟁이 전국으로 퍼지자 일본은 늘어나는 수감자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양식 근대 감옥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 가는 1987년까지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 고초를 겪었습니다.
 

 

 

   <출처-직접촬영, 서대문형무소와 독립운동>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소되어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며 규모가 커졌습니다. 그 이유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애국지사들이 늘어나 지속해서 형무소에 투옥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우리나라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 곳곳에 감옥을 설치하여 우리 민족에 공포심을 조장하고, 나라 전체를 감옥화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이 되기까지에 많은 저항을 했었는데요, 대표적으로 3?1 독립만세운동이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졌고, 해외까지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외치는 비폭력 만세운동이었지만, 일제의 무력적인 진압에 맞서 후에는 무기를 들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3~5월에 걸쳐 약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고,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수감 46,948명 이상이 발생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출처-직접촬영, 민족저항실>

 

 <출처-직접촬영, 물고문하는 모습>

해방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들은 서대문형무소 보안과 청사 지하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수감자들은 지하의 취조실을 ‘지하고문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지하실에선 고문하는 모습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므로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출처-직접촬영, 상자고문>
 
한국을 지배하기에 벅찬 일본 제국주의는 문화통치의 역량이 안 되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폭력과 고문을 자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실제 갇혔던 이병희, 이규창 지사의 증언을 들어보면 고문이 얼마나 사람의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지, 다시 한 번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직접촬영, 중앙사 내부>

 

 
그다음으로는 중앙사를 볼 수 있습니다. 중앙사는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1923년에 지은 건물입니다. 1층에는 간수 사무실과 옥사를 감시하는 감시대가 있고, 2층에는 강당을 설치하여 집회 및 사상전향 교육 장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이제 서대문 형무소 안의 제일 넓은 건물인 옥사로 가볼까요?
 

 

 

 <출처-직접촬영, 먹방>

12옥사 내에는 독방이 3개 있습니다. 한 개의 독방은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창을 막아 빛 한 줌 들어오지 않아 ‘먹방 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곳은 일종의 징벌방으로 정치범이나 벌을 받는 사람이 며칠 동안 갇혔습니다. 먹방에 오랫동안 갇혀 있게 되면 공황장애를 겪는 등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먹방에서는 용변을 방 끝에 있는 배출구를 통해 밖에서 처리했습니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두컴컴했습니다.
 

 

 

   <출처-직접촬영, 격벽장>

위에 사진은 수감자들이 운동하면서 서로 말을 못 하게 하도록 벽을 나눠놓은 작업장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서울구치소가 이전할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곳인 사형장,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인 한센병에 걸린 수감자들을 따로 가둔 한센병사, 몰래 시신을 내가도록 한 시구문, 수감자들이 탈옥 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려고 지은 시설인 망루 등이 있습니다.
제가 제일 기억에 남았던 곳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 실에 형무소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사진들을 붙여 놓은 곳이였습니다.
 

 

 

<출처-직접촬영, 사방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분들의 사진이 전시되어있는 방>

 서대문 형무소에 다녀온 후 느낀 바가 참 많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독립운동가분들의 고초를 생생하게 담아두었습니다.  나라의 소중함을 목숨을 바쳐 일깨워준 독립운동가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요? 서대문 역사박물관을 방문하여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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