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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에 나타난 창의성(1) : 추사체에 나타난 창의성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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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에 나타난 창의성(1) : 추사체에 나타난 창의성 스토리

대한민국 교육부 2018. 1. 30. 16:18

 

 

 

추사와 추사체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정조10∼1856, 철종7)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근거하여 금석학과 고증학 분야의 업적을 많이 남긴 실학자이다. 그는 당시 서예와 그림에서 이른바 ‘완당(阮堂) 바람’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문화 흐름을 주도한 예술가로, 개성과 창의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추사의 생애에서 제주 유배 9년의 생활은 삶에 대한 철학, 이로 인해 서체가 변화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제주의 삶은 추사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추사체는 매우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글씨로 알려져 있다. 추사체의 특성을 말할 때 ‘괴(怪)’와 ‘졸(拙)’로 묘사할 수 잇다. ‘괴’가 추사체의 개성이라면, ‘졸’은 ‘괴’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한, 노자의 이른바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의미의 졸로 꾸밈없고 순수한 경지를 말한다.



 



추사의 삶과 개성


추사는 경주 김씨로,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이자 화순옹주 남편이었으며, 조부 김이주, 부친 김노경 모두 고위관직을 두루 거친 당대 노론세력집안이었다. 추사는 정조 10년에 태어나 순조, 헌종을 거치고 철종 7년에 졸하여 네 명의 왕을 거쳤으니, 정조 이후 세도정치의 정치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54세 제주 유배 이전까지 ‘괴(怪)’의 삶은 귀족자제로 자부심과 자신감에 따른 개성의 표현이라면, 유배 이후 ‘졸(拙)’의 경지는 스스로를 성찰하며 얻은 삶의 철학의 표현이다. 추사체는 제주 유배생활에서 완성되는데,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통해 삶의 철학적 변화 과정에서 그의 예술은 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의 삶은 괴와 졸의 만남이며, 추사체의 변화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의 변화이며 세계와 조응하여 이루어진 추사의 철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추사의 삶은 당시 유교사회에서 수용된 일반적인 도덕상식을 지키면서도 그 상식을 넘어서되 결코 균형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이 감히 자웅(雌黃)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자신만만하면서도 그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며, 오만하면서도 가족과 지인, 제자들을 두루 챙기는 온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을 지키면서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경계를 넘은 행동과 개성을 보여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넘침을 덮을 수 있는 천재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괴’는 ‘괴’이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이 할 수 있고, 다른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추사체의 ‘괴(怪)’의 예술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중 한 명만 꼽으라고 할 때 단연 김정희라고 하였다. 그는 추사체를 평가하여 “낡은 법첩(法帖)을 따르는 매너리즘과 향토색에 젖어 있던 어딘지 촌티 나는 조선의 글씨를, 비문 글씨의 고졸하고 준경 한 기품을 간직한 개성적인 서체로 구현하여 국제적 감각의 신풍을 일으켰다.”라고 하였다.

서예를 잘 모르는 사람도 추사체의 독특한 개성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존의 일반적인 서예 양식을 벗어난 독창적인 글씨이다. 누구나 추사체를 쓸 수 있지만 누구도 추사체를 쓸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아무렇게나 쓴 것 같지만 실제로 추사의 기와 혼이 서려 있어 제대로 된 추사체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괴’의 뜻을 함축하는 ‘기이함’ 또는 ‘괴상함’이란, 일반인들이 수용하는 평범한 경지를 넘어서서 특이함을 뜻하며, 일상적인 아름다움[美]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추사체의 괴는 ‘괴적(怪的)인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과 통한다. 즉 일반적이고 평범한 아름다움의 틀을 깬, 상식을 넘어선 비균형적인 균형, 비조화로운 조화의 경지인 것이다.




유배와 추사체의 완성


추사체는 제주 유배시절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추사체의 본질에 대해 환재 박규수와 창명 임창순 선생의 논의를 보면, 핵심은 “고전, 특히 전한 시대의 예서를 임모하면서 입고출신의 정신으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창명 선생도 서한의 예서를 임모하면서 제주에서 서풍이 기졸분방(奇崛奔放)한 자태를 보이면서 “예절과 형식을 무시한 장난꾼”처럼 보였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붓을 통하여 표현”되었으며 당시에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고 평하였다. 이에 대해 유홍준은 “유배지에서 마음을 다스린 결과가 하필이면 왜 ‘괴(怪)’라는 개성으로 나타났단 말인가.”라며 반문하면서 동주 이용희 선생이 말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만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한 인간의 예술은 그 사람의 삶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인격과 예술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인간됨의 특성은 예술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예술도 일상의 소감(所感)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추사체의 괴는 인간 추사의 여러 요소들의 종합이다. 천재적 예술성뿐만 아니라 유복한 환경, 자신만만함이 만들어낸 자신감의 결과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 인간 추사의 개성과 기질이 ‘괴(怪)’의 특성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예술로 구체화되어 ‘추사체’로 드러난 것이다.




 창은 작지만 빛이 많아(小窓多明)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使我久坐)




 

<죽로지실(대나무 화로가 있는 서재)>

'죽로(竹爐)': 글씨 속에서 손잡이가 달린 대나무 화로를 보는 듯

'실(室)' : 팔각 창문이 달린 방문, 그림이 글씨고 글씨가 그림




<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매화와 같이 한 산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 참고문헌

- 장승희, “괴(怪)와 졸(拙)로 본 추사의 철학적 인간학”, [유학연구] 제34집(충남대학교 유학연연구소, 2016), pp.139-164에서 발췌


 

 


글_ 장 승 희 교수 (제주대학교)

남부권 초등 창의교육 거점센터 (제주대)

출처_ 크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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