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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의 창의성

대한민국 교육부 2018. 2. 19. 09:00

 

 

 


‘뺄셈의 창의성’ 이란 우리가 창의성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는 ‘덧셈’의 관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21세기 여기저기서 창의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조경제’, ‘창의‧인성’, ‘창의적 인재양성’, ‘창의융합교육’, ‘창의력 교육’, ‘창의적 기업’, ‘창의력 아카데미’ 등 어디에서건 창의성이라는 홍수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창의성’이라는 트렌드를 걸치지 않으면, 우리의 경쟁력이 훼손될 것처럼. 그러다 보니 기존의 하던 것에다 창의성이라는 스펙을 하나 더 걸쳐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생기고, 기존에 하던 업무의 양이나 교육의 양은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창의성이라는 업무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하는 형국이다. 결국 현장에서는 창의성에 대해 알아보고, 창의성 향상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든 자투리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의무적으로 창의성 교육을 하고 있다는 생색을 내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창의성 교육은 내실보다는 형식에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진짜 창의성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창의성이란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의)교육에 대한 고정관념도 버려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창의성 교육’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창의성 교육은 무엇을 더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며, 둘째, 창의성 교육은 무엇을 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덜 배우는 것이다.



 

 

창의성 방해요인을 빼는 것이 창의성 교육이다


우리가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하려고 하지 말고, 기존에 창의성을 방해하는 요소만 제거해도 된다. 우리가 창의적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애초에 창의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창의성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창의성을 방해하는 것. 우리의 생각이 자유롭게 뻗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제한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고,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고정하는 사고의 틀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갇혀있는 사고의 틀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하고 그 사고의 틀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빨리 완성하고 성급하게 결정하려는 경향성을 버리는 것이 창의성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창의성이다. 또한 주어진 관점을 버리고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이 바로 창의성인 것이다. 창의성이란 우리가 익숙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창의성 방해요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며, 그 내용을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제공해서 창의성 방해요인을 제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창의성 방해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빼야 할까?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빨리 답하거나 끝내려는 태도, 남보다 잘 하고 싶은 욕구,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수는 끔찍하다는 생각, 익숙한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 의존적 태도, 나잇값 해야 한다는 생각,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높은 사람에게는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창의성을 저해하는 요소일 것이다.


다음에 나의 습관이나 태도, 또는 생각 중에서 창의성이 저해하는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고 기술해보자. 창의적이기 위해서 무엇을 새롭게 더 하는 것보다 기존에 나한테 있는 것 중에 창의성을 방해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자,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나의 창의성을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도전!


 


또는 나를 둘러싼 환경(물리적 환경, 심리적 환경) 중에 창의성을 저해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물리적 환경이란 우리가 사는 집, 학교, 직장, 크게는 마을과 도시를 말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Google이나 IDEO의 사무실과 휴게실은 창의성을 키워주는 물리적 환경은 어때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약 우리의 집 거실에 커다란 TV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가족들은 이 TV를 보기 위해 모일 것이고, 가족들의 주된 활동은 TV시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집 거실에 TV가 없고, 한쪽 벽에는 세계지도가 있고, 한쪽 벽에는 책장이 있고, 또 한쪽 벽에는 공구세트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족들은 여가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 물리적 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어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창의적인 환경은 구성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며, 그 구성원의 생각을 조성할 수 있는 중요한 자극제이다.


심리적 환경이란, 우리가 스스로를 창의적이라고 느끼도록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지 아닌지를 말한다. 부모나 상사, 교사나 친구들이 제공하는 창의적 압력은 우리가 창의성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도적으로 미완성된 교육이 제대로 된 창의성 교육을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미완성된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잘못된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완전한 지식이나 정답을 학생들에게 주고 싶어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상에 나올 것 같은 예상문제들을 미리 다 알려주고, 그 문제도 객관식 답으로 선택해서 풀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나왔던 문제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는 세상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었고, 때로는 엉뚱하거나 넌센스와 같은 답들이 정답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의성 교육이란 “기존의 지식에 여러 가지를 덧붙여가며 지식을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더 가르치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덜 가르치고,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불완전하게 가르쳐 줌으로써 남은 부분을 학생들 스스로 의문을 갖고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교사는 여기서 학생들이 다소 다른 길로 나아가더라도 막아서거나 의도적인 길로 유도해선 안 된다.


 


무엇을 덜 가르치자고 하면 교육현장에서는 저항이 크다. 학생들의 저항이 큰 것이 아니라 교사들의 저항이 크다. 교사들이 당황한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덕분에, 덜 가르치는 것은 곧 교사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교육이 교사 중심의 교육이었고, 교육의 한가운데 주연은 교사였다. 학생은 청중이고, 교사의 원맨쇼를 보면서 대사와 연기가 멋진 배우에게는 훌륭한 교사로, 대사와 연기가 부족한 배우에게는 준비가 부족한 교사로 치부하였다.


오늘날 교육의 패러다임이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면서 교육의 한가운데 주연은 교사가 아니라 학생으로 바뀌었다. 교육의 중심에는 학습을 하는 학생이 있고, 교사는 이 과정을 조율하는 코치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패러다임과 과거의 교육방법에 익숙한 교사들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바뀐 교육방법에 당황해하고, 불만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주연에서 갑자기 조연의 역할로 떨어진 배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을 뿐이지, 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덜 알고 있다고 하여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을 마음껏 펼쳐 나가게 해야 하며 자신들의 문제점이나 잘못된 점마저도 스스로 찾아내도록 해야 한다. 이런 탐구 방법에 대해 교육하고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글_ 하 주 현 교수 (건양대학교)
수도‧중부권 중등 창의교육 거점센터 (충남대)
출처_ 크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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