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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두 번 받은 천재 화학자

대한민국 교육부 2018. 2. 19. 09:00

 

노벨상 두 번 받은 천재 화학자

노벨상 오디세이 (23)




세계적인 섹시 스타 안젤리나 졸리는 지난 2013년 유방 절제술을 받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녀가 스스로 유방 절제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들 중에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유방암이나 난소암으로 사망했으며, 모친 역시 유방암으로 고생하다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녀 역시 브라카원(BRCA1)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에 이른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모친으로 이어져온 졸리의 유방암 확률을 밝힐 있었던 것은 바로 개인의 DNA 염기서열과 인간 표준 유전체를 분석해 비교하는 기술 덕분이었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이후 과학자들은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그중에서 염기서열을 가장 손쉽게 알아내는 기술을 개발한 이가 바로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였다. 즉, 안젤리나 졸리가 미리 유방암 절제술을 받을 수 있은 것은 바로 프레더릭 생어 덕분이었던 셈이다.



노벨 화학상을 2회 수상한 유일한 과학자인 프레더릭 생어. ⓒ Public Domain



그는 DNA 한 가닥을 주형으로 삼아 상보적인 가닥을 합성하는 DNA 중합효소를 이용해 염기서열을 알아내는 특이한 방법을 고안했다. 즉, DNA 중합효소가 DNA를 복제할 때 OH기가 없는 특정 핵산이 끼어들면 중합이 끝나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생어는 이 같은 방법으로 DNA 5386개로 이뤄진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 파이엑스 174’의 게놈을 1977년에 완전히 해독했으며, 1981년에는 염기 1만6569개로 이뤄진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단백질 화학구조식 최초 규명


인간의 전체 게놈 정보를 해독하는 ‘휴먼 게놈 프로젝트(HGP)’ 이후 염기서열 분석법은 더욱 발전해 한 번에 여러 개의 DNA를 동시에 해독하는 ‘병렬 해독 기법’이 개발됐다. 최근에는 세포에 있는 막단백질 통로 구조체를 이용해 DNA를 실시간으로 읽어내는 새로운 방식의 게놈 해독 기술까지 등장하고 있다.


2003년에 완료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13년간 38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됐다. 그러나 조만간 100달러로 개인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해독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옛날에 당뇨병은 다리 근육이 녹아서 오줌으로 흘러내리는 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21년 밴팅 등의 과학자들이 개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추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많은 당뇨병 환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63년에는 인슐린을 화학적으로 합성할 수 있게 돼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 역시 프레더릭 생어가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그는 사슬 모양 단백질 분자의 말단정법(末端定法)으로 다이나이트로페닐화법을 생각해낸 이후 10년간 연구한 끝에 1955년 소의 인슐린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규명했다. 즉, 단백질 중 최초로 구조식이 밝혀진 게 바로 인슐린이다.


이 공로로 그는 195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기술 개발, 즉 DNA와 RNA 분자의 뉴클레오티드 서열을 결정하는 방법을 개발한 공로로 1980년 폴 버그, 월터 길버트와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지금까지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사람은 프레더릭 생어를 포함해 단 네 명뿐이다. 마리 퀴리가 방사능 연구로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을 받았으며 라이너스 폴링은 화학결합 연구로 1954년 화학상, 반핵운동으로 1962년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국의 물리학자인 존 바딘은 트랜지스터 개발로 1956년 물리학상, 초전도이론 정립으로 1972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화학상을 2회 수상한 것은 생어가 유일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천재 5위


프레더릭 생어는 1918년 8월 13일 영국 글로스터셔 주의 랜드콤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생어도 의사가 되길 원했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후 생화학에 흥미를 느꼈는데, 그것은 당시 학과장인 어네스트 볼드윈 박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3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아무런 경제적 수입이 없었으나, 1944년부터 의학 연구를 위한 베이트 기념 연구비를 받게 된다.


1951년 의학연구협회의 후원을 받아 연구할 때까지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생화학 연구를 계속했다. 1958년 노벨상을 받은 생어는 이후에도 강의나 행정적 업무 부담을 지지 않고 기초연구에만 전념하기 위해 케임브리지에 계속 남았다. 1962년에는 케임브리지의 신축 분자생물학 실험실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연구하며 핵산에도 흥미를 가졌다.


정원을 가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생어는 대부분의 유명 과학자들과는 달리 1983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해 연구를 그만두었다. 그때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를 내리려 했으나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연구를 그만두고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서 프레더릭 생어는 언제나 최고의 과학자로 남아 있었다. 2007년에 ‘크리에이터스 시넥틱스’라는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좋은 예다. 이 업체는 영국인 4000명에게 이메일을 보내 살아 있는 이들 중 세계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택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은퇴한 지 20여 년이 넘는 프레더릭 생어가 5위를 차지한 것.


젊은 과학자를 위해 자신의 연구 공간을 내어주고 기꺼이 은퇴를 선택한 프레더릭 생어는 2013년 11월 19일 95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글_ 이성규 객원기자 yess01@hanmail.net

출처_ 사이언스올 사이언스타임즈

저작권자 2018.01.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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