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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놀라운 조선의 온실 본문
쓰레기 더미에서 건저올린 우리의 위대한 유산
조선의 두 번째 궁궐 창덕궁.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동궐도를 살펴보면, 지금은 유실되어 창덕궁 후원으로 진입하는 길이 되어버린 '중희당' 왼쪽으로 ‘창순루’라는 건물이 있다.
동궐도에 그려진 창순루(蒼荀樓)를 보면 반 타원형체의 둥근 지붕, 창살이 없는 문과 섬돌이 놓여 있는 쪽마루가 있고 마당엔 붉은 꽃이 핀 화분이 놓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창순루는 실내 온도를 데워주는 벽장이라는 가온 시설을 갖춘 독특한 목조건물로 궁중에서 겨울철 대전이나 왕대비전에 꽃을 피워 올리기 위해 운영되었던 정조 때 온실로 확인되었다.
동궐도의 창순루 모습 ⓒ구글이미지
복원된 창순루의 모습 ⓒ 이인옥
동궐도(東闕圖): 국보 249호.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통칭 ‘동궐’이라고 불렀는데 그 모습을 순조 30년(1830) 이전 조선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가로 576㎝, 세로 273㎝.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온실에 관한 기록은 동궐도 말고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71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궁궐에 쓰이는 꽃을 키우는 기관인 장원서(掌苑署)에서 철쭉과의 일종인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임금께 올리자, 왕은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는데,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바치지 마라”고 하셨다.
『성종실록 제13권』
세종 20년(1428)5월 27일 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언(上言)하기를, …… 신은 또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듣사온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造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세종실록 제81권』
토우(土宇움집)라 하여 온실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
『양화소록(養花小錄)』
(세조 때의 문신인 강희안(1417∼1464)이 지은 원예 책)
(세조 때의 문신인 강희안(1417∼1464)이 지은 원예 책)
토우에서 겨울에 시금치를 기르게 하다.
『조선왕조실록(연산군)』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이미 온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어떠한 방법으로 조상들은 온실을 지어 사용하였을까? 이 의문은 2001년 우연한 기회에 풀리게 된다.
2001년 10월 폐지더미 속에서『산가요록』이라는 옛 농서(農書) 한문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18cmx26cm 크기의 한문 묵서로 된 이 책은 앞뒤부분이 심하게 손상돼 있지만, 책의 끝 부분에 '산가요록 마침'이라는 기록이 있고 전순의찬(全楯義撰) 최유준초(崔有濬抄)라고 적혀있다.
전순의(全循義) : 조선 초기(1450년대) 세종부터 세조시대까지 의관(御醫)으로 봉직. 그는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의사인 '식의' 에서 출발했음에도 세조 정난 때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좌익원종 공신으로까지 봉해지는 등 큰 출세를 한다. 그는 의관 노중례와 함께 한의학의 3대 저술 중의 하나인 『의방유취』를 공동 편찬했으며 세조의 명에 의해『식료찬요(食療纂要)』라는 의서를 지었다. 당시 권위 있는 의사며 식품학자였다.
『산가요록(山家要錄)』: 18cm X 26cm 31장의 저지(楮紙)로 된 무괘백지(無罫白紙) 한문 필사본으로 농사짓는 법과 더불어 음식의 조리에 관한 여러 가지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2001년 발견된 책은 매우 낡아 앞 뒷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농업에 대한 기록인 앞부분과 문집으로 보이는 뒷부분이 훼손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수운잡방(需雲雜方)』보다 80년 정도나 앞선 1459년경에 지어진 책이다. 『산가요록』에는 술 빚는 방법 63가지, 장 담그기, 식초 만들기, 식품 저장하는 법 등 조리 부분에는 229가지의 조리법과 27가지 채소 과일 생선 육류의 보관법이 기록돼 있다.
『산가요록』은 그동안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떠한 형태인지 몰라서 애타게 했던 온실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생산했다는 소위 ‘동절양채(冬節養菜)’가 그것이다.
동절양채에는 ‘먼저 적당한 크기로 온실을 짓되, 삼면을 막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남쪽면도 살창을 달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게 잘 처리하고 온돌 위에 한자 반 높이의 흙을 쌓고 봄 채소를 심는다. 건조한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되, 날씨가 몹시 추우면 반드시 두꺼운 날개(飛介: 오늘날의 멍석과 같은 농사용 도구)를 덮어 주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철거한다.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혀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담밖에 솥을 걸고 둥글고 긴 통을 만들어 그 솥과 연결해 아침, 저녁으로 불을 때서 솥의 수증기로 방을 훈훈하게 해 주어야 한다.’라고 쓰여있다.
산가요록 원문
造家大小任意三面築蔽塗紙油之南面皆作箭
窓塗紙油之造突勿令煙生突上積土一尺半許
春菜皆可載植於夕令溫勿使入風氣天極寒則
厚編飛令掩窓日瑗時則撤去日日酒水如露房
內常令溫和有潤氣勿令土白乾又云作(光)於築
外掛釜於壁內朝夕使釜中水氣薰扁房內
『산가요록』 ⓒ구글이미지
『산가요록』으로 자세한 실체를 알게 된 조선전기의 온실은 지금까지 세계 최초의 온실로 알려진 1619년의 독일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179년이나 앞선 것이다.
온실을 정의 내리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겨울철 방에서 콩나물을 기른 것도 온실의 일종이라 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외의 외국 고서에서도 온실로 추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다. 중국『한서』(중국 후한 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에는 ‘태관의 원유에서 겨울에 파, 부추, 채소, 나물을 심어 키우는데, 지붕을 덮고 울을 쳐서 밤낮으로 불을 지펴 그 온기로 키운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염철론』(BC74-BC49 중국전한 선재 때 환관이 지은 12권의 사료)에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겨울철에 식물을 키우는 방법이 쓰여 있다. 8세기경 당나라 현종 시대에는 화실(火室)에서 오이를 조숙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290년 로마에서 겨울철 장미를 키우기 위하여 운모와 활석으로 창문을 만들고 가열할 수 있는 온실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온실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조선의 온실은 온실이 지녀야할 요건을 두루 갖추었으며, 복원이 가능한 기록이 현존하고, 과학적이며 우수한 온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선 초기 온실의 우수성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온실은 난방, 가습, 채광이라는 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는데 조선의 온실은 이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① 온돌을 이용한 땅속 뿌리층 가온 방식
난로로 데운 공기를 바람으로 불어넣어 온실 내부 공기 온도를 높이는 방식은 식물에 스트레스를 주며 차가운 땅까지 데우지 못하는 단점을 갖는다. 식물의 생장은 지상부뿐만 아니라 뿌리의 발육도 중요하기 때문에 최근의 온실에는 온수파이프를 이용한 난방이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온실에 이미 지하부의 온돌 난방을 이용하여 흙 온도를 25℃로 유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설계였다고 보인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온실은 난로로 지상부만 가온 하기 때문에 작물을 재배하려면 화분이나 다른 재배시설을 설치하여야 하는 단점이 발생한다.
난로와 화분을 이용한 유럽 온실 ⓒ구글이미지
② 기름 먹인 한지(유지)를 이용한 온실 효과
판유리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은 창호지로 쓰이는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서 온실 채광창으로 이용하였다. 기름 먹인 한지는 인장 강도가 비닐보다 세어 빗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며 빛 투과율이 높아져 태양빛을 온실 내로 투과시킨다.
온실 내벽 역시 기름칠한 한지로 도배를 하여 햇볕이 실내에 골고루 반사되게 만들었으며, 천정을 통해 투과된 복사열은 실내 바닥과 황토 벽체에 흡수되고 장파장의 복사열로 바뀌면서 한지를 통해서는 다시 나가지 못해 온실 내의 온도가 상승하는 온실효과를 볼 수 있다.
현대 온실의 유리 벽체보다 조선 온실의 흙담 벽체가 열의 손실을 막는데 더욱 효과적이었으며, 눈 오는 날이나 밤에는 보온을 위해 짚으로 만든 차양막(飛介)을 한지 창호 위에 덮었다.
③ 기름 먹인 한지창의 투습성
유리나 비닐로 만든 온실은 온도 차에 의해 새벽에 이슬이 맺힌다. 이 차가운 이슬은 햇볕을 차단하여 실내 온도를 낮추고 작물에 떨어지면 피해를 입히게 된다. 하지만, 기름 먹인 한지는 방수성을 가지면서도 투습성이 있기 때문에 작은 수증기 입자가 한지를 통하여 실외로 배출되어 온실 내부에는 이슬이 맺히지 않는다. 이 기능은 근래 운동복 원단으로 쓰이는 고어텍스의 기능이 아닌가? 알면 알수록 대단한 기능을 지닌 한지에 감탄스러울 뿐이다.
기름먹인 한지를 유리 대신에 사용 ⓒ구글이미지
④ 온실 내부 가습기능
아침저녁으로 온돌에 불을 때었는데, 이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여 수증기가 나무로 된 홈통을 통해 온실 내부로 흐르도록 하였다. 이 수증기는 실내의 온도와 습도를 함께 높이는 작용을 하였다. 온도뿐만 아니라 습도까지 조절할 수 있었으니 건조한 우리나라의 겨울에 알맞은 방법이며, 온풍으로 건조해지는 가온 방식보다 훨씬 과학적인 방법이었다고 보인다.
홈통으로 수증기 주입 ⓒ구글이미지
오늘날의 온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던 조선 초기의 첨단 영농시설인 온실이 전승되지 않고 맥이 끊겼으며, 전해지는 여러 농서에 기록조차 돼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한 답은 알 길이 없으나 실마리는 세종 20년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 20년(1428)5월 27일 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언(上言)하기를, …… 신은 또 강화(江華) 인민의 말을 듣사온즉,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造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세종 10년경에 강화도에 과목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로부터 10년 뒤 백성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그 온실을 없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온돌이 고려시대 이후 대중화되면서 연료의 확보가 점점 어려워졌고, 식품 저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겨울철에도 채소를 저장할 수 있었기에 고비용의 온실 재배 방법은 경제성이 없어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온실 말고도 여러 가지 과학적인 영농 기법을 자랑한다. 15세기에는 느삼뿌리를 찧어 물에 타서 뿌려 채소 벌레를 잡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농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조상들은 과학적인 방법을 생활에 이용하였으나, 자연과 교감하는 친환경적 문화였으며 절대권력의 왕이라도 필요 이상의 사치를 고집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의 온실이 세계 최초의 온실이라고 무조건 주장 할 수는 없지만, 복원 가능한 기록이 현존하는 최초의 온실이며, 온실의 기준에 미흡함이 없는 과학적인 온실이어서 후손으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세계 최강, 세계 최초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선조의 전통을 기록하고 보존하여 후대에 전하고 물려받은 유산의 장점을 실생활에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가히 자랑할 만한 조선 온실은 2002년에 남양주 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으나 그 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2006년 새롭게 사단법인 우리문화가꾸기회에서 양수리 세미원(洗美苑)의 석창원 실내공간에 복원해 놓았다.
세미원內 석창원에 복원된 조선온실 모습 ⓒ 이인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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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역사스페셜7』, 효형출판, 2004
정재훈, 『한국 전통 조경』, 도서출판 조경, 2005
김영진, "『농상집요(農桑輯要)』와 『산가요록(山家要錄)』", 농업사 연구 (2권 1호), (2003.6)
이훈석, "창순루(蒼荀樓)의 건축구조와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농민과 사회(통권44호), (2007. 봄)
장성강 외 2명, "조선 초기 난방 온실의 복원과 환경 조사", 한국농공학회 학술발표논문집, 2003
정해권 외 1명, "조선 온실의 과학적 특징에 관한 연구", 한국생태환경 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11호), 2006
조동우 외 2명, "15세기 조선온실건축의 기능 및 실내환경 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통권194호), (20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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