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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식 교육을 거부한 아인슈타인

대한민국 교육부 2017. 10. 25. 18:45


주입식 교육을 거부한 아인슈타인

노벨상 오디세이 (4)




지난달 21일 미국 전역을 가로지르는 99년 만의 개기일식 때 과학계 역시 흥분했다. 미국국립대기연구센터와 NASA에서는 항공기를 띄워 개기일식을 관측하는 등 달이 햇빛을 완전히 가리는 지역 전체가 거대한 실험실로 바뀌었다.


또한 그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98년 만에 다시 검증하는 역사적인 관측도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1916년에 발표된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빛도 구부러진다.


1919년 5월 아프리카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맞다는 사실을 관측으로써 증명했다. 태양 주변의 별이 태양 쪽으로 약간 휘어진 위치에서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 대신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 public domain


태양 바로 곁에 있는 별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개기일식 때나 가능하다. 이후 상대성이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잠잠해졌으며, 아인슈타인은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과학 스타로 우뚝 섰다.


그보다 앞서 물리적 시공간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완전히 뒤엎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것은 1905년이었다. 시간 및 공간에 대한 기존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철학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이 이론의 발표로 아인슈타인은 1908년에 처음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상대성이론 때문에 노벨상 수상 지연



그러나 그는 1921년에서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게다가 그의 노벨상 수상 업적은 상대성이론이 아니었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이론물리학에 기여하고 특히 광전효과의 법칙을 발견한 공로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론보다 실험을 강조했던 당시 물리학계는 혁명적 이론에 대해서 특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좀 더 깊은 사연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의심하는 과학 석학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노벨위원회 물리학 부문의 심사위원이며 나중에 심사위원장까지 지낸 스웨덴의 알바르 굴스트란드는 상대성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을 막았다.


그러다가 1920년에 젊은 이론물리학자가 새로이 심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굴스트란드가 상대성이론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는 상황을 눈치 채고는 상대성이론 대신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주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스웨덴에서 행한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회에서 광전효과가 아닌 상대성이론에 대해 강연했다.


아인슈타인은 당대의 석학들마저 놀라게 한 천재 중의 천재 과학자였다. 과연 그는 어떻게 이처럼 획기적인 발상을 하게 되었던 걸까. 사실 아인슈타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스위스 베른 전매특허국에서 일할 때까지 그렇게 주목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아니, 그의 학창 시절은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다. 세 살이 다 되도록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은 초등학교 때 교사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학업 성적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은 물론 숙제마저도 안 하고 학교에 가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입식 교육을 매우 싫어해 교사 입장에서 볼 때 무례한 행동이 잦았다. 따라서 그는 라틴어 문법처럼 억지로 외우는 과목은 전혀 공부하지 않고 수학과 과학에만 흥미를 느꼈다.


이런 그의 행동은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이어졌다. 독일의 김나지움(중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지 못한 채 부모를 따라 이탈리아로 간 그는 전기공학자가 되기 위해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에 지원했다. 하지만 입학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수학과 물리학 성적은 뛰어났으나 다른 과목에서 낙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호기심을 일깨운 나침반


결국 아라우에서 1년간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다닌 뒤 대학에 진학한 그는 거기서도 교수가 가르치는 고전물리학 등에 염증을 느꼈다. 대신에 그는 루드비히 볼츠만,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등 이론물리학자들의 저서를 구입해 혼자서 공부하기를 즐겼다.


암기만 중시하고 창의성은 무시하는 주입식 교육에 진저리를 쳤던 아인슈타인은 호기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어린 시절 그의 호기심을 일깨운 첫 번째 사물은 바로 나침반이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오직 북쪽만을 가리키는 붉은색 자침은 그에게 사물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탐구하게 했다.


일반인들은 호기심을 가져도 그때뿐 순식간에 잊어버리지만, 아인슈타인은 달랐다. 그는 일단 호기심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지 전까지 거기에만 몰두했다. 이런 그의 호기심은 노벨상을 타고 유명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1926년 베를린에 머물던 아인슈타인은 당시 사용하던 냉장고에서 아황산가스가 유출되는 바람에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우연히 접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동료 물리학자와 함께 인체에 무해한 냉장고 개발에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알코올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냉장고를 발명해 특허를 획득했다.


이 냉장고는 생산 단계까지 미치지 못했으나 당시에 촬영한 발명품 사진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상당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새로운 냉장고 기술의 개발에 나선 것은 특유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소박한 생활 태도로도 유명했다. 이발을 잘 하지 않아 더부룩한 머리에 늘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녔던 그는 학자들의 로망인 연구실마저 욕심을 내지 않았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넓은 연구실을 제공하자 좁은 곳으로 바꾸어달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기자가 방문해 실험실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아인슈타인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실험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글_ 사이언스타임즈 이성규 객원기자 yess01@hanmail.net
출처_ 사이언스올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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