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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을 사랑한 화가

대한민국 교육부 2018. 2. 2. 23:31

 

에펠탑을 사랑한 화가

<트로카데로에서 바라본 에펠탑>




프랑스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파리 만국 박람회’때 프랑스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1832~1923>에 의해 세워져 그의 이름에서 명칭을 얻어 에펠탑으로 붙여졌다.


건축공학자인 귀스타브 에펠이 세운 에펠 회사는 1875년 헝가리의 페스트역과 포르투갈 도루강의 대규모 교량 공사를 수주하면서 국제적인 건설업체로 도약한다.


에펠 회사는 1884년 당시 세계 최대 공사로 알려진 프랑스 남부의 가리비 고가교를 완성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각지의 수많은 철교를 설계하여 국제적 명성을 쌓는다.


에펠의 수많은 건설 경험은 뉴욕 ‘자유의 여인상’의 내부 설계와 파나마 운하의 공사에 참여하게 했다. 결국 그는 불후의 명작 에펠탑을 건설해 찬사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축물인 에펠탑은 1889년 만국 박람회의 입구로 1887년부터 1889년까지 건축되었다. 건립될 당시 높이는 약 300m로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층 건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첨탑과 통신용 안테나가 덧붙여져 총 높이는 324m가 되었다.


에펠탑은 모리스 쾨클랭의 구조 설계를 바탕으로 300여명의 작업자들이 정련된 부품 조각을 50만 개의 리벳을 이용해 조립해 완성했는데, 현대의 마천루 건물과 다르게 에펠탑은 두 개 층 외에는 외벽이 없는 열린 형태였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매우 컸다.


하지만 에펠이 가드레일과 가림판을 설치해 사고를 최소화함으로써 단 한 명만이 사고로 사망했을 정도로 안전하게 건축하였다. 에펠은 적은 노동력과 싼 비용으로 25개월 만에 탑을 완공해 1889년 3월에 준공식을 가졌고, 5월 6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완공 당시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들은 예술의 도시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혐오스러운 건물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소설가 모파상, 에밀 졸라, 알렉상드르 뒤마, 작곡가 샤를 구노 등 예술인들은 파리의 수치, 천박한 이미지라며 비판에 앞장섰다.


에펠탑은 건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산업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건축물이다. 돌을 사용하던 건축에서 철을 재료로 건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89년 5월 6일부터 10월 31일까지 180일 동안 열린 박람회 기간 중에 에펠탑은 당시 센 강변에 설치된 수많은 전시장을 압도했다. 만국박람회 기간 중에 3천200만 명의 관람객이 파리에 몰렸으며, 관람객들은 에펠탑을 보고 감탄했다. 화가들 역시 에펠탑의 모습에 매료되어 화폭에 담아냈다.




-1900~1901년경, 캔버스에 유채, 55*45.

<트로카데로에서 바라본 에펠 탑>-1900~1901년경, 캔버스에 유채, 55*45. ⓒ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만국박람회 당시의 에펠탑을 그린 작품이 루이스 웰덴 호킨스의 <트로카데로에서 바라본 에펠탑>이다.


왼쪽에 알렉상드르 팔기에르가 제작한 청동 조각품 <아시아>가 크게 보이고 광장 위에는 에펠탑 하단이 보인다. 센 강에 놓인 다리가 샹드마리스 광장까지 이어져 있고, 광장 끝에는 루이 15세 통치 하에 지어진 군사학교 건물이 보인다.


알렉상드르 팔기에르의 <아시아> 동상은 당시 주문 제작된 여러 개의 대륙 상징물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 광장에 전시되어 있다.


에펠탑은 탑의 기둥이 보이지 않아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호킨스는 에펠탑의 철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아시아> 청동 조각상에 실제와 전혀 다른 오렌지, 노랑 등 따뜻한 색상을 사용했다.


루이스 웰덴 호킨스<1849~1910>는 1878년 만국 박람회 당시 건립되어 1937년까지 궁으로 쓰인 트로카데로의 조망대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


그림의 제작년도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센 강 주변에 수많은 국가관이나 주제관이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89년 박람회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 세계인들의 시선이 파리에 집중되었던 1878년, 1889년, 1900년 세 번의 만국 박람회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에펠탑은 건설 후 20년 후인 1909년에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오늘날까지 건재하며 파리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에펠탑을 가장 사랑한 화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마르크 샤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파리였으며 에펠 탑은 파리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그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다.


샤갈이 파리를 사랑한 가장 큰 이유는 안정과 사랑을 선사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캔버스에 유채, 130*96.

<파리 위의 신부>-1877년, 캔버스에 유채, 130*96. ⓒ 개인 소장




샤갈의 파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파리 위의 신부>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이를 안고 도시 하늘 위를 날고 있다. 아래에는 에펠탑과 노르트담 대성당이 보인다. 왼쪽 신부 주변에 꽃을 든 남자가 하늘을 날고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남자와 천사가 보인다.


흰색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샤갈의 두 번째 아내 바바다. 바바는 벨렌티나 브로드스키로 애칭 바바로 불렸다. 첫 번째 부인 벨라가 병사한 후 샤갈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고, 딸이 소개한 러시아 출신 여인 바바를 만나 재혼한다.


바바는 벨라의 뒤를 이어 샤갈의 보호자 같은 역할을 했으며, 샤갈이 명성을 쌓을 수 있도록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꽃을 든 남자는 샤갈을 나타내며, 꽃을 들고 신부에게 날고 있는 모습은 아내에 대한 경의를 의미한다.


하단에 에펠탑과 노르트담 대성당은 배경의 도시가 러시아 비테프스크가 아닌 파리라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오른쪽 상단에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남자와 작은 집들은 러시아 유대인의 전통 문화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는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샤갈에게 러시아 비테프스크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이 작품에서 신부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은 행복을 의미한다. 그는 행복하다는 이미지를 날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하늘에 우뚝 솟아 있는 신부의 모습은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년에 샤갈은 삶의 의미를 성서에서 찾아 성서를 많이 제작한다.




글_ 박희숙 미술평론가

출처_ 사이언스올 사이언스타임즈

저작권자 2018.01.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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