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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정조의 화성행차길을 따라가다 본문
조선후기, 나라의 중흥을 꾀했던 정조! 실학사상에 사상을 기반을 뒀던 대표적 왕입니다. '정조' 하면 특별히 생각나는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수원에 건설된 화성입니다. 화성이 완공된 후 정조는 그 유명한 8일간의 화성행차를 하기 위해 1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당시 새롭게 건설한 도시 화성을 돌아보고, 거기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열고, 그 근처로 이장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을 참배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행차 길에 백성을 직접 만나 어려운 점을 듣고 해결해 주는 일, 화성에서 성민들을 돌아보는 일, 지방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 등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습니다.
한편, 조선왕조는 기록을 남기는데 충실하였습니다. 우연히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님의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영우 교수님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와 우리나라의 기록문화에서 최고의 권위자십니다. 교수님의 책은 재미있고 쉽게 설명되어 있어서 역사서임에도 학생인 저도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답니다. 교수님은 세계적으로 이렇게 방대한 기록을 가진 예가 없다고 하시네요. 제 꿈이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을 한 것이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 인문 영재학급의 연구과제(소 논문) 주제로 이 내용을 선택했습니다.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물은 9건인데 그 중 <조선왕조 의궤>도 포함됩니다. <의궤>는 왕실의 혼례·장례, 성곽 건설 등 모든 일의 상세한 기록을 남긴 것인데 여기에는 기록과 함께 세밀한 그림이 함께 있어서 한 편의 사진이며 또는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는 함 속에 들어 있는 물건 그림까지 있다고 하니 사진보다 더 세밀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됩니다. <조선왕조 의궤> 중 1795년 2월, 정조의 화성행차와 화성성역건설이 기록된 부분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입니다.
2013년 10월, 저는 논문을 쓰기 전 두 의궤의 기록을 중심으로 정조의 화성행차 길을 따라가 보며 영감을 얻기로 했답니다. 21세기 현재에 다시 '행차'하며 지점마다 1795년 정조가 그곳에서 했던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조의 화성행차의궤에 그려진 <반차도>
<조선왕조 의궤> 중 '원행을묘정리의궤'라고 이름 붙여진 화성행차의궤에는 <반차도>라고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를 <반차도>라고 합니다. <반차도>에는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등장하는데, 행차를 위해서 미리 파견된 사람이나 매복된 군사들까지 추정하면 6,000명 정도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래서 그런지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다르고 해학적인 모습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반차도> 중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행차 부분인데, 정조의 모습은 말만 있고 사람이 없는데, 왕의 모습은 그리지 않는 관례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 한영우, 효형출판) 중 한 부분을 찍은 것입니다.
행차의 주인공인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조가 탄 말이 어머니 혜경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때문에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간다고 하네요.
자, 이제 1795년 2월 저 그림 속 행렬이 지나갔던 곳을 2013년 10월 제가 지나가 보겠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가마를 타고, 정조는 말을 타고, 대다수 수행원은 걸어서 지났던 길입니다. 당시는 창덕궁에서 수원 화성까지 이틀이 걸렸습니다. 저는 시간상 아빠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갔더니 오후 3시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행궁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창덕궁 정문- 돈화문>에서 출발
정조가 살았던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입니다. 정조는 궁에서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어머니(혜경궁)를 모시고 두 누이를 대동하고 출발합니다. 돈녕부 앞길 - 파자 전 돌다리 - 통운 돌다리 - 종로 앞길 - 대광통 돌다리 - 소광통 돌다리 - 동현(명동) 병문 앞길을 지나갑니다.
<한국은행 앞길-서울역 근처>
당시 지명은 '송현'이라고 하는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 부근을 지나 수각 돌다리(구 서울시 경찰국 부근) - 숭례문(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 도저동(지금의 서울역 부근 앞길)에서 청파교 쪽으로 방향을 틀어 율원현(원효로 2가 용산 방면) - 석우(남영역 앞) - 만천주교(용산역 부근)를 지나 노량 배다리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은행 앞 길서울역 근처
'배다리'로 건넜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노들섬>
정조의 행차 당시 한강에는 한강대교가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건너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400여 척의 배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정조는 생업에 종사하는 선상들이 동원되는 번거로움을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가끔 사용했던 배다리를 더욱 더 최소의 비용으로 안전하게 놓는 방법을 생각했고, 정조가 직접 설계에 나섰습니다.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다리의 안전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배다리 설계안이 만들어졌습니다. 다리를 연결하는데 들어간 교배선은 36척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영우 교수님은 조선 시대 다리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다리를 놓은 지점이 지금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였다고 추정하는데, 당시는 노들섬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 길에 한강대교가 놓여서 저는 차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권수의 주교도,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 한영우, 효형출판) 중 한 부분을 찍은 것입니다.
한강대교 노들섬 북단노들섬과 한강철교가 보이는 한강대교 위
<노량행궁>
다리를 건너자 왕은 노량행궁(지금의 동작구 본동)에 먼저 도착하여 어머니가 쉴 방과 찬품(음식)을 조사하고 다시 나가서 어머니를 맞이하였습니다. 일행은 여기서 음식을 들고 휴식 후 다시 출발합니다.
<장승배기 길>
정조는 장승배기 고개를 지나 상도동길을 지나 문성동 앞길에서 다시 어머니께 미음다반을 직접 올렸습니다. 정조는 먼저 출발하여 그날 유숙지인 시흥행궁으로 가서, 어머니가 묵기에 불편함이 없을지 점검한 후 기다렸습니다.
정조 일행이 첫째 날 저녁을 지낸 시흥행궁은 지금은 없어지고 그 터에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만이 있습니다. 이 행궁은 화성 행차를 위해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는 정리사가 차려 준 음식을 직접 살펴본 후 어머니께 올립니다.
사근참 행궁이 있던 <골사그내>
정조는 시흥행궁을 떠난 왕은 시흥대로를 따라 안양, 의왕시 왕곡동(골사그내)에 있는 사근참 행궁에 도착합니다. 어머니를 맞아 점심을 먹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밤을 지낼 생각이었으나 방사가 낮아 밤을 지내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다시 출발하게 했습니다.
저희 일행이 '행차'하던 중 날이 벌써 어두워졌네요. 제가 가 본 '골사그내'는 고속도로 주변인데, 사근참 행궁은 이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가 갔던 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내려서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화성의 서문 <화서문>
마침내 골사그내를 지나니 거의 바로 수원의 <화서문> 푯말이 보였습니다. 정조가 갔던 길이 단거리 길이었으며, 이 길을 따라 후손들도 길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화성의 서쪽 문 <화서문>을 통해서 성곽 안으로 들어갑니다. 화성의 성안입니다. 성곽이 둘러싸여 있고 성곽 안에는 층이 낮은 건물들과 벽돌 같은 느낌의 재료가 깔린 도로가 있는 평온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서울의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로를 다녔던 것과 비교했을 때와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건설에 관한 기록으로 조선왕조 의궤 중 한 부분입니다.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상세한 건설 기록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설계도는 물론, 노동자들의 이름까지, 그들이 며칠 일했고, 얼마의 임금을 받았고, 반일 임금까지 명확하게, 그리고 건축자재 중 돌은 어디서 얼마에, 이런 식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할 때 80만 냥 정도의 예산을 편성했고, 10년 정도 기간을 예측했는데, 2년 6개월 정도 걸려서 완성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한영우 교수님은 당시 미국의 워싱턴,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같은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기록은 없다고 하시고, 토목실명제, 투명성 등이 나타나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화성에서 있는 동안 묵었던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정조가 갔을 때 신풍루 앞에 작은 개울과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모습은 있고, 앞에 넓은 광장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정조는 이 문으로 들어가 중앙에 있는 봉수당에서 어머니는 왼편의 장락당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정조는 화성향교를 방문하여 유학 진흥의 뜻을 밝히고, 문무과 별시를 열어 인재를 뽑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 다녀오기, 서장대에서 군사들의 야간 훈련, 봉수당에서 어머니의 성대한 회갑잔치를 열었으며,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낙남헌에서는 노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또한, 행차의 중요한 목적인 화성 성곽을 시찰했습니다. 경관이 가장 빼어난 정자인 방화수류정에 가서 자신이 설계한 성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문무를 겸한 군주상을 보이기 위해 득중정에 가서 활쏘기도 했답니다.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을 상징하는 <팔달문>
사통팔달한 이 지역의 특성을 살려 <팔달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화성의 문입니다. 제가 이곳에 가보니 시장이 있고 '왕이 만든 시장'이라고 홍보하는 문구가 적힌 깃발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상품화폐 경제로 흘러가는 것을 정조는 이미 읽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원칙 등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을 받아들이고, 화성건설을 위해 사유지를 수용하면서도 적당한 가격을 지급했습니다.
<느낀 점 및 교육적 가치>
책에서 본 내용을 현실에서 직접 가보는 시도를 했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을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 안에도 도시가 있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화성 건설이라고 책에서만 듣고 보았을 때는 새로운 도시 건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도 성곽만 떠올랐습니다. 성 안의 마을을 봤으니 이제 성곽만 떠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는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중기 같은 도구의 사용과 공사 담당자의 실명을 통한 책임성 강화, 상세한 기록을 통한 부정부패를 줄이는 투명성 등,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화성은 정말 빨리 지어졌습니다. 10년의 공사 예상 기간을 2년 6개월 정도로 단축시켰죠. 또한, 화성 행차를 함으로써 얻어진 경제적 이득도 있답니다. 정조가 행차할 때, 현 한강대교 근처에 배다리를 놓았는데, 여기서 탁월한 기술 발전이 이루어져 후세에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주기도 했답니다. 또,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면서 새로이 만들어진 길도 있는데, 이것은 훗날 지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의 효심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정말 지극하게 모셨는데, 가는 곳마다 먼저 가서 묵을 처소의 상태를 점검하는 등 어머니가 오시면 맞을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며, 정리소(화성행차를 담당한 관청)에서 차려준 음식을 직접 확인하고 어머니께 올렸습니다. 특히 '반차도'에서 왕임에도 어머니의 가마를 뒤따라 호위하며 가는 듯한 모습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저도 이를 본받아 부모님께 정성껏 효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점은 이를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입니다. 기록문화 유산이 후손에게 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가치를 생각해 봤습니다. 기록을 통해서 후손인 우리에게 옛날 사람의 삶, 배다리 건설 기술 같은 지적재산(know-how), 화성 설계도 같은 알림 자료, 실명제를 통한 담당자의 책임성 강화, 상세한 기록을 통한 부정부패의 예방 등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록을 통하여 한 인간의 효심까지 전해져서 저에게도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일종의 '타임캡슐'이 아닐까 합니다.
끝으로 위 내용의 역사적 사실과 그림 등은 다음 두 권의 책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 한영우/ 효형출판』, 『조선왕조 의궤/ 한영우/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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