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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류, 조선통신사! 본문
언론을 통해 오늘날 수시로 들려오는 ‘한류’. 오늘은 한류의 시초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한류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볼까요?
'한류(韓流)'는 한국의 문화가 해외로 전파되어 인기리에 소비되고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방정책이 본격화된 후, 199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된 한류의 현상은 처음에는 영화, TV 드라마, 대중음악, 게임 등 대중문화의 해외 유통과 소비가 위주였지만, 점차 패션, 음식, 한글 등보다 폭넓은 한국 문화의 해외 진출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도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문화가 해외로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실상 한류는 조선 시대 때부터 있었습니다. 어떻게 조선 시대에 한류가 있었을까요?
다같이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볼까요?
조선통신사 역사관은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에 대하여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역사 교육의 현장입니다.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 콘텐츠, 알찬 프로그램 등으로 역사와 소통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총 2개의 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1전시관은 조선통신사의 정의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회복까지의 과정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볼 수 있으며 통신사의 파견 절차, 여정, 이물, 한인 외교의 중심지, 왜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제작한 3D 입체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영상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선 제1전시관을 살펴볼까요 ?
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외교사절입니다. 조선은 개국 직후, 당시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주던 왜구를 막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통신사 왕래가 이어져 평화적 우호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통신사 파견은 임진왜란으로 외교관계가 끊어지면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사명대사 유정과 도쿠가와 이에이스의 교섭으로 관계복원의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그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계승하거나 경사가 있을 때마다 막부의 요청에 의해 통신사가 파견되어, 1607년에서 1811년까지 200여 년간 총 12회에 걸쳐 왕래가 이루어졌습니다.
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적 외교관계를 상징합니다. 다시말해 옛날 조선의 국왕은 조선과 일본 양국의 우호의 증거이자 문화와 지식의 교류라는 큰 사명을 가지고 수백 년 동안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이 사례는 지금의 시대야말로 더 넓게 확대되고 전 세계가 목표로 해야 할 ‘평화’에 대한 훌륭한 모범사례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한 조선통신사 과연 그들은 누구일까요?
흔히, 에도(江戸)시대를 '쇄국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은 중국,네덜란드,조선과 '통상국 '로서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에도시대를 단순히 '쇄국시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통신의 나라 '였던 조선과 류쿠로부터 국왕의 사신이 일본에 파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을 조선통신사라고 합니다. '통신(通信) '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 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 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구성원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내가 만약 조선통신사였다면 구성원 중 어떠한 역할이 어울렸을지 상상해볼까요?
정사는 통신사의 총책임자입니다.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는 인품이 높고 경험이 많으며 풍채가 좋은 사람이 선발되었습니다. 부사는 정사를 수행하고 보좌하며 사무를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종사관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면서 매일매일의 사건을 기록하였다가 귀국 후 국왕에게 견문한 바를 보고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상역관은 통신사를 수행하며 통역 담당뿐 아니라 일정, 숙식 등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제술관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서 선발되었고 일본 문사와 필담을 나누며 양국문화교류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의원은 사행원의 건강을 보살피고 질병, 부상 등을 치료하는 주치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상재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사람으로 무예를 숭상하는 일본에서 큰 인기였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戸)까지는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 3,000㎞의 여행이었습니다. 긴 여로의 곳곳에서 통신사는 일본의 많은 문인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았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선단(船團)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일본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를테면 부산항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에게 자신이 쓴 시나 글을 평가받기 위해 부산에 정말 많은 일본인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한류스타를 보기 위해 일본인들이 공항에 마주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1층에 있는 3D 영상실
왜 조선통신사가 최초의 한류인지 짐작이 가시죠?
제2전시관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타고 갔던 배의 모형(판옥선)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본까지 파견될 당시의 험난한 뱃길을 보여주는 영상을 비롯하여 통신사의 주요행로를 볼 수 있는 모형지도와 에도성에 들어가는 통신사행렬을 재현한 생생한 89면 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가대로 이어지는 야외 옥외공간은 관람객에게 쾌적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2전시실도 같이 관람할까요?
-가와고자부네를 타고 요도강을 거슬러 오르다.
오사카는 통신사행의 바닷길이 끝나고 육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발달한 상업도시였던 오사카의 번화한 모습에 통신사 일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통신사가 오사카에서 쿄토로 가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가 제공한 배를 타고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습니다. 가와고지부네라고 하는 이 배는 2층으로 건조되고,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국서를 실은 배를 앞세우고 사신이 탄 배와 이를 호위하는 수많은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광경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습니다.
-화려하고 번화한 대도시, 교토
교토는 통신사들이 왜경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통신사행의 대표적인 경유지였습니다. 교토는 화려한 건물이 늘어선 번화한 도시이면서, 오래된 사찰이 많은 천년고도였습니다. 교토를 지나면 비와코와 오우미하치만을 지나는데, 이곳에는 '조선인가도'란 비석을 세워 놓은 길이 있었습니다. 이 길은 원래 쇼군이 천황이 있는 교토에 갈 때만 이용하던 전용도로였는데, 오직 통신사만이 이 길로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에도성에서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다.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는 의신인 전명의를 거행하였습니다. 행사 당일 통신사는 의장기를 갖추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국서를 모신 용정자를 호위하여 에도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성에 이르면 세 사신은 쇼군이 있는 혼마루로 들어가 국서와 선물을 전달하였고 이를 받은 쇼군은 집정에게 일러 사신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뒤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조선은 쇼군에게 인삼, 비단, 호랑이가죽, 문방사우, 매 등의 선물을 전다라였고, 쇼군은 갑옷, 큰칼, 병풍, 서랍장 등을 답례로 주었습니다.
마지막 통신사의 모습 같이 살펴보실까요?
-쓰시마로 간 마지막 통신사
통신사의 파견은 1811년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통신사의 파견과 접대는 두 나라 모두에게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되어 통신사행은 쓰시마까지만 왕래하는 행사로 축소되었습니다. 더욱이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과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아시아 쟁탈 경쟁에 휘말려 사절을 파견하거나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후,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과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이 맺어온 교린 관계는 막을 내렸습니다.
통신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통신사, 선린 외교의 모범을 남기다.
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하던 시기에는 전쟁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통신사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다채롭게 발전시켰으며, 조선 또한 통신사의 일본 체험과 문물 교류를 바탕으로 자국의 문화를 자각하고 일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통신사는 진솔한 마음의 교류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 상호이해에 바탕을 둔 평화적 우호관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구제외교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범적인 문화사행의 전례입니다.
야외 모습입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진도 찍고 휴식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다녀온 후 저는 여러가지를 느꼈습니다. 처음에 저는 수신사와 통신사가 같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맨 처음 조선통신사역사관에 대해 이야기 들었을 때 ‘아, 신사유람단? 뭐 그런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조선통신사역사관을 다녀오면서 수신사와 통신사의 큰 차이를 알았습니다. 통신사는 우리의 문물을 전달하는 역할이지만, 수신사는 일본의 문물을 배워서 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조선통신사역사관을 다녀오면서 우리나라 옛 조상님들의 지혜로움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이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는데 일본이 모든 비용을 지급했으며 정말 국빈대우로 그들을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조선의 높은 지식을 전수받는데 있어 일본의 열정적인 모습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조선에서만 통신사가 간 줄 알았는데 일본에서도 통신사가 몇 번 왔다고 합니다. 통신사에 해당하는 일본 사절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입니다. 그러나 1622년을 끝으로 '일본국왕'의 국서를 지참한 일본국왕사는 단절되었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다녀오면서 믿음을 교류한다는 ‘통신’의 뜻이 참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최근 한일 양국 간의 올바른 관계정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과거의 조선통신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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