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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기록 없는 장영실은 외계인?(하) 본문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안여란 임금이 타는 가마를 말하는데, 장영실이 감독하여 만든 가마가 부서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임금이 다쳤다는 등의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가마는 아마 시험으로 타보던 중에 부서진 것으로 추정된다.
▲ 관노 출신에서 종3품에 이른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
사실 장영실이 실수를 저질러 처벌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425년 남원부사로 부임하던 이간이 관용물자를 빼돌려 여러 사람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발생했는데, 장영실도 뇌물 수수자로서 벌을 받은 적이 있다.
또 1430년에는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을 따라 북경에 다녀오다 요동 조선관에서 머무르던 중 사신 일행이 관아의 말을 타고 사냥을 했다가 발각된 적이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의금부에서는 주범 이징에게는 형장 100대, 종범인 장영실 등에게는 형장 90대를 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2등을 감해 직첩을 거두지 말게 하고, 특별히 장영실과 다른 한 명만 벌금형으로 처리하는 관용을 보였다. 그런데 안여 파손 사건의 경우 단 한 번의 실수로 장영실은 관복을 벗어야 했고, 또한 그 후로도 세종은 다시 장영실을 찾지 않았다.
세종은 그처럼 아끼던 장영실을 왜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에 영원히 내팽개쳐 버렸던 것일까?
그런데 장영실을 파문한 세종은 그해 말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간의대를 헐어버리고 거기에다 자신의 퇴위 후 거처할 이궁을 짓게 한 것.
▲ 고도와 방위 측정을 정밀하게 할 수 있었던 천문관측기기 '간의'
당시 조선은 매년 초겨울에 동지사를 중국으로 보내 명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달력 110부를 받아서 사용했다. 달력은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시기를 알려주는 데 사용되므로, 농업 사회에서 매우 귀중했다. 그런데 조선은 왜 명나라에서 굳이 달력을 받아서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명나라가 주변국들에게 역법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중국의 황제가 직접 천명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므로, 중국 외의 주변국은 모두 황제가 하사하는 역법을 사용해야 된다는 논리였다.
이는 명나라의 풍속 및 법률을 정리해 놓은 ‘야획편’에도 적혀 있는데, 명나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천문학 공부를 할 수 없으며 달력을 만들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명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도 천문과 역법의 독립을 가장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은 지리적 조건이 다르므로 명나라의 역법과 천문학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동지사가 중국에서 달력을 받아 돌아오면 정초가 훨씬 지나 있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따라서 세종은 한양을 기준으로 새로운 달력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 기초 작업으로 진행된 것이 바로 천문을 직접 관측하는 간의대 사업이었다. 이처럼 당시 국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간의대를 건립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헐어버리겠다는 세종의 명이 내려지자 상소가 빗발쳤다.
안팎의 궁궐이 다 준비되어 있어서 거처할 곳이 많은데 왜 굳이 간의대를 허물려 하는지 모르겠으니 이궁을 짓는 일을 중지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또 사헌부에서도 간의대는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힘쓰는 처소인데 경홀하게 헐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세종은 간의대를 헐어버린 후 경복궁의 가장 구석진 북쪽 끝으로 옮겨지었다. 세종이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숙원 사업의 일환인 간의대를 헐어버린 이유는 세종실록에도 나와 있다.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하였다.” (세종실록 1443년 1월 14일)
세종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처음 간의대가 자리했던 곳은 경회루 바로 뒤였는데, 경회루는 명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면 잔치를 베푸는 곳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사신들이 간의대를 볼 수밖에 없었고, 독자적으로 천문을 관측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심각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었던 것.
이런 분위기는 간의대가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진 중종대에서도 감지된다. 1537년(중종 32) 중국 사신에게 준 지도에 간의대도 기록되어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중국 사신이 와서는 중종에게 직접 간의대에 대해 물어본 것.
그때 중종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며, 간의대 주위에 울타리를 높이 쳐서 안 보이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대체로 제후국의 제도가 아니므로 숨기려는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을 달아놓았다.
▲ 아산 장씨 시조묘에 조성되어 있는 장영실의 가묘
실록에 의하면 조순생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것을 보고도 장영실에게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럼에도 세종은 조순생을 처벌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으며, 이에 대해 신하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항의했음에도 세종은 끝까지 분명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관노가 대호군이라는 종3품 벼슬까지 올랐고, 더구나 문신 중심사회에서 기술자가 수많은 업적을 내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니 장영실에게 쏟아졌을 보이지 않은 질시와 비난은 엄청났을 것이다. 따라서 안여 사건 하나로 장영실이 그처럼 큰 처벌을 받은 것은 그동안 누적된 질시 세력들의 이 같은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장영실이 사라진 후의 어느 역사 기록에서도 그에 대해 나쁜 평판이 실린 적이 없다. 때문에 장영실의 갑작스런 퇴장은 불경죄라는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조선 사회는 관료들이 임무를 수행하다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매우 엄격히 문책했으므로 장영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또한 장영실이 다시 복귀하지 못한 것은 세종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에서 더 이상 그가 기여할 부분이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로는 장영실이 문책을 당한 후 조용히 살다가 갑자기 죽었으므로 세종이 다시 부를 기회가 없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1383년생이 맞다면 문책 당시 장영실은 이미 예순 살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갑작스런 퇴장을 감안하더라도 장영실의 이후 활동이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퇴장 후 장영실의 생에 대해서는 본관인 아산에서 살았다는 설과 부친의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여생을 마쳤을 거라는 설 등이 분분하다.
한편, 세종이 명나라 사신의 눈에 띄지 않게 경복궁 북쪽 구석으로 옮긴 간의대는 결국 1915년경 일본 총독부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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