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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은 어떻게 혼례를 치렀을까요? 본문
조상들은 어떻게
혼례를 치렀을까요?
■ 우리 조상들의 여러 가지 결혼 풍습
▲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식을 치르는 현대인들의 모습(출처: 에듀넷)
우리는 흔히 ‘시집간다, 장가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요,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결혼 풍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집간다’는 표현과 남자가 장인의 집으로 간다는 의미인 ‘장가간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미루어 볼 때, 결혼에 관한 다양한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의 고구려 편에서 우리 고유의 결혼 풍습인 장가들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혼인하는 경우, 구두로 미리 약속하면 여자 집에서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사위집’이라 부른다.”
이는 고구려의 독특한 혼인 풍습인 ‘서옥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서옥'이란 '사위집'의 한자 표현입니다. 농경사회였던 옛날에는 노동력이 매우 귀했습니다. 처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면 노동력의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사위가 일정기간 신부의 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중매를 통한 결혼 풍습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혼서’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랑집에서 예단과 함께 신부집으로 보내는 편지로, 중매를 통해 혼인 상대의 조건과 의중을 알아본 후 서로 뜻이 맞으면 납폐함에 담아 혼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귀족사회에서의 결혼은 개인의 결합이기보다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중매인을 통한 혼례절차가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평민들 사이에서는 자유연애가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 혼서와 납패함(출처: 에듀넷)
지금은 일부일처제이지만 옛날에는 여러 부인을 두는 다처제도 존재하였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정식 혼인을 한 경우는 처가 되지만, 남성과 함께 살면서도 정식 부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 첩이라고 합니다. 처는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만 첩은 그렇지 않았으며 첩의 자식은 서자라고 하여 사회 진출에 차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다처제는 재산 상속 관련 분쟁이 종종 일어나 1413년 3대 왕 태종이 두 번 혼인하는 것을 금지시키면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처제뿐만 아니라, 이혼 및 재혼과 관련한 풍습도 변하였는데 조선 초기까지는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1477년 과부재가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차츰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중요시 여겼던 나라로 성리학자인 주자가 만든 [주자가례]를 생활 지침으로 여겼습니다. 성리학자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혼인 풍습에 있어서도 성리학에 따라 부계 중심의 가문의 결합을 중시하였습니다. 1435년 왕실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본가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방식인 친영례를 시도하였고 이후 사대부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처가에서 3일 정도 머물렀다가 시댁으로 가는 반친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혼인을 가족의 결합으로 중시했기 때문에 혼인의례가 매우 신중하고 복잡합니다. 먼저 양가가 중매인을 통해 서로 의사를 조절하는 것을 '의혼'이라고 합니다. 의혼을 통해 서로의 의사가 확인되면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대례를 치릅니다. 신랑이 혼인의식을 치르기 위해 처음 신부의 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이라고 합니다.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맞절을 하며 식을 거행하는 것을 '초례'라고 하며 예식을 치르는 곳을 '초례청'이라고 합니다.
▲ 초행과 초례(출처: 에듀넷)
혼례를 마친 신부는 친정을 떠나 시댁으로 가게 되는데, 이를 '신행'이라 합니다. 신행 후 신부는 미리 준비해 온 대추, 밤, 술, 과일 등을 올리고 시댁의 어른에게 절을 하는데, 이를 '폐백'이라 합니다. 신부의 절을 받은 시부모는 자식을 많이 낳고 잘 살라는 의미로 신부에게 대추와 밤을 던져줍니다. 전형적인 폐백은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오늘날에는 결혼식 혼례 후 예식장에 마련된 폐백실에서 간소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답니다.
▲ 오늘날 폐백의 모습(출처: 에듀넷)
혼례 시 사용하는 나무기러기는 짝이 죽어도 다른 상대를 찾지 않고 따라 죽거나 평생 혼자 사는 새로 여겨진 기러기의 상징물입니다.
▲ 나무기러기(출처: 에듀넷)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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