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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교육부 이야기/부모의 지혜 나눔

예술로 조국애를 표현한 알폰스 무하

대한민국 교육부 2013. 10. 13. 13:00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그림 속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을 알고 나면 또 다른 면을 보게 되는 행운을 얻기도 합니다.

<보헤미안의 봄> 유토피아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연인들> 사라베르베르 연극포스터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알폰스 무하-아르누보와 유토피아 전'아르누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접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예술조국애를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책의 삽화, 잡지의 표지, 우편엽서나 달력, 포스터, 광고의 문구에서 보는 이국적이고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여인들이 상징성을 띄고 조국애를 노래하고 민족의 화합을 꿈꾸기도 했었던 것은 무하의 염원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런 무하의 이야기를 전시된 작품을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시관은 포스터, 드로잉, 유화, 장식화를 비롯한 서적, 사진235점을 전시하여 ‘파리의 보헤미안’, ‘무하스타일의 창시자’,‘코스모폴리탄’, ‘신비주의자’, ‘애국자’와 ‘예술적 철학가’ 5편으로 나눠 무하의 각기 다른 단면을 반영하여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보헤미안>

체코 태생무하1887년 파리에 왔습니다. 그 당시 파리는 경제 부흥을 겪으며 낙관주의의 번성으로 예술분야의 부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예술가 무리와 각 변방에서 모인 학생들로 소수 민족 공동체가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1889년 초반에 후원자였던 쿠엔 벨라시 백작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기자 무하는 생계를 위해 상업예술가로 일하여 파리와 프라하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과 잡지에 게재되는 삽화를 그렸습니다. 힘든 시기에 무하는 자신과 같은 배고픈 예술가들을 만납니다. 폴 고갱도 그때 만나 친분을 갖게 됩니다.

<로렌차초>의 포스터와 습작<지스몽다>-무하를 성공으로 이끈 포스터

프랑스 당대의 가장 유명한 여배우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한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주문받습니다. 1895년 새해 첫날 파리의 광고 선전탑에 이 포스터가 나붙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원색적인 다른 포스터들과는 달리 파스텔색조의 투명한 색채와 명암으로 채워진 무하의 포스터는 비잔틴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배경화려한 중세풍의 의상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장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진의 사라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지만, 포스터의 사라는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그녀의 정신과 캐릭터를 화폭에 옮긴 거라는 설명처럼 매력적이었습니다.

<파리 시절의 무하>

무하는 그 후 6년간 사라를 위해 <카멜리아>, <로렌파치오>, <사마리여인>, <메데>, <햄릿>, <토스카>와 같은 포스터를 제작했고, 무대 장치와 의상, 소품과 보석을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힘든 시기를 겪었던 무하에게 기회는 왔고 그 기회를 무하는 놓치지 않고 예술적인 안목을 발휘하여 최선을 다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쉰 살의 여배우 사라 또한 외모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정확히 밖으로 끌어내어 표현해준 무하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무하 스타일의 창시자>

무하는 장식패널, 달력, 엽서 등을 선보이며 ‘무하 양식’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황도12궁>, 연작 패널화<사계>, <네 가지의 꽃>,<과일과 꽃> 등 몽환적인 여성들이 상징성을 지니며 세심하게 선택된 자연과 함께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습니다. 무하 양식은 있는 사람들의 미술이 아닌 값싼 목로주점의 먼지 낀 벽에서, 가난한 학생의 허름한 하숙방에서 혹은 고급 주택의 응접실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무하는 눈이 머무르는 어느 곳에서나 있는 대중을 위한 예술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무하 양식의 포스터는 광고주와 소비자 모두 좋아했다고 합니다. 무하는 거의 백 년 전의 사람이지만 광고에서 매우 현대적이어서 지금에 와서도 많은 광고에 그의 이미지가 인용되고 있는 점만 보더라도 무하의 감각은 무척 뛰어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장르인 ‘아르누보’와 무하는 어떻게 연결이 되었을까요? 아르누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기에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된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예술 사조였습니다. 독일 출신의 딜러인 지크프리트 빙이 1895년 문을 연 파리의 화랑 ‘메종 드 아르누보’로부터 명칭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1900년까지 아르누보는 유럽 전역에 걸쳐 확산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양식을 생산해 내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나라의 민족적 전통과 섞이었는데 ‘무하 양식’슬라브족 요소를 무하는 자신의 작품 속 안에 들여옴으로써 이 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봅니다. 무하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아르누보 운동의 발달과 함께 하여 커지면서 ‘아르노보의 거장 무하’라는 명성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도12궁: 달력의 장식패널><하루의 시간-아침, 낮, 저녁,밤>

<코스모폴리탄>

무하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다양한 분야의 전시와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뢰받아 제작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파빌리온 벽화는 제국을 위한 기여로 프란츠 요제프 1세 훈장을 받게 했으나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슬라브 민족이 고통을 겪는 모순적 상황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 무하는 조국을 위해 <슬라브 서사시>제작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민족에게 고통을 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고뇌가 무척 컸을 거라는 건 무하가 그 후의 조국을 위해 한 일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파빌리온:무하의 벽화가 있는 실내사진><무하의 미국 방문을 보도하는 1904년 4월3일자 뉴욕 데일리 뉴스>

 

<신비주의자>, <애국자>

무하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프리메이슨 체코지부의 총본부장이 됩니다. 무하는 신앙적인 면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말하는 미, 진실, 사랑의 덕목이 인류의 토대가 되고 그것을 예술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인류의 진보를 향한,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 중-비트코프 전쟁이 끝난 후>1916년

애국자의 면모를 보여준 <슬라브 서사시>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20점의 연작화입니다. 무하는 지난 천 년간의 모든 슬라브 민족의 고통과 업적을 다룬 역사화로서 이 작품이 슬라브 인들에게 정치적 독립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함께 힘을 합쳐야 함은 물론이고 미래를 향해서 슬라브인과 더불어 범인류적인 평화의 추구를 제안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작품이 절반쯤 완성되었을 때 그의 조국은 체코슬로바키아로 다시 탄생하였고 그는 프라하시에 작품을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슬라브 서사시 전시회 포스터><슬라브 서사시 연작-캔퍼스 작업을 하고 있는 무하>

전시관 입구의 세 소녀가 들판에 있는 모습을 그린<보헤미아의 노래>이라는 작품은 전시회의 제목인 ‘아르누보와 유토피아 전’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새로운 조국의 재건을 위해 따스함이 넘쳐나는 곳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평화롭게 있는 모습이야말로 그가 꿈꾸었던 조국의 모습이자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새로 탄생한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자 했던 무하는 조국을 위해 우표와 지폐의 디자인까지 열정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토록 바라던 슬라브 민족의 통합은 이제 인류애로 확대되어 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며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나치의 침공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무하는 1939년 7월 80번째의 생일을 열흘 남겨두고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예술적 철학자>

1939년 그의 죽음으로 완결되지 못한 <이성>,<지혜>,<사랑>시대의 새로운 3부작은 지혜를 가운데 두고 작업을 한 것은 지혜를 바탕으로 인류가 진보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무하의 유토피아적인 철학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인과 타는 초,1933년>-조국을 염려하는 무하의 마음이 표현되었다고 함

내 작업의 목적은 사람들을 재건하고, 단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류가 서로 이끌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이 서로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모두 희망해야 한다.”라는 무하의 말이 그의 예술적 철학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활 속으로 들어온 무하의 작품들>

무하장식화가라는 오명을 벗고 그의 철학적 세계관과 미학적 고려를 통해 재조명되어 우리 곁에서 전시되고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저는 이 전시회를 둘러보고 무하의 삶과 예술품을 보면서 무하의 애국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적에 좋아했던 황미나 만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준 화가로 알폰스 무하를 얘기했던 기억만으로 가볍게 전시관을 찾았던 저는 알폰스 무하가 꿈꾸었을 유토피아민족적 화합과 사랑과 믿음을 포함한 전 인류의 평화였음에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그의 유토피아가 저의 조국에도 이루어지길 희망해 봅니다.

 

우리가 접하는 그림 속에는 작가가 전하는 많은 메시지수많은 예술가적 고뇌가 담겨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살았던 시대나 환경들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들어 가게 됩니다. 따라서 작가가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주변 환경이나 시대적 흐름과 같은 배경을 습득하고 작품을 만난다면 더 깊은 감명과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다녀오면서 앞으로는 예술 작품 전시회를 갈 때 사전에 미리 관련 이야기를 읽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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