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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민서포터즈

상하이로 떠나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 기행

대한민국 교육부 2016. 8. 10. 22:39

<상하이로 떠나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 기행>


 

여러분은 6월에 무얼 하실 계획인가요? 짧은 연휴 동안 가족과 함께 하실 생각인지요? 
6월은 현충일, 한국전쟁,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것을 기념하는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그 중 6월 6일은 현충일이며, 동시에 국가지정공휴일이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단순히 6월을 공휴일이 있는 달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저는 이 기사에서 지난 5월 한 주 간 다녀온 중국 상하이 여행에서 만난 우리 조상의 독립운동의 흔적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상하이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홍커우 공원에 위치한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까지, 상하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우리 독립운동을 마주하실 준비가 되셨나요?


▶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우리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꽤나 큽니다. 우리가 주권을 잃었을 때,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논의하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임시헌장을 공표한 곳인 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역사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한 곳입니다. 지난 5월 24일, 상하이를 방문한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를 견학하게 되었고, 생각했던 것에 비해 작은 규모에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골목에 들어서면 3층짜리 작은 건물 주변에 일반 상점들이 즐비하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정부청사골목 옆에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의 보전 상태가 많이 아쉬웠습니다.


▲ 상하이임시정부청사 주변 도로 모습 (직접촬영)

가장 먼저 1층에 있는 응접실을 방문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역사가 대략적으로 담긴 영상을 시청하였으며, 좌측 입구로 입장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건물 2층에는 이승만, 박은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하였던 집무실이 위치하여 있으며, 3층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하였던 침실과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 전시관이 있습니다. 좁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당시 사용하였던 부엌과 화장실 등을 볼 수 있었는데, 어려웠던 상황에서 진행한 독립운동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당시 정부청사에 걸려있던 태극기, 독립운동가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청사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아쉽게도 청사 내부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시 임시정부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처음 조직되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까지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후 충칭으로 정부청사를 옮겼습니다. 상하이임시정부청사는 1989년 상하이의 도시개발계획으로 인하여 사라질 뻔 하였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요청에 따라 1993년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 입장권 (직접촬영, 20위안)

입장하기 위해서 입장권이 필요한데, 입장권은 20위안이며 원화로는 대략 3600원정도 하는 가격입니다. 그러나 그리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기에 상하이 방문 기회가 있는 분들께 방문하는 것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여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요?


▶ 홍커우 공원


 1) 윤봉길 의사




▲ 윤봉길 의사 흉상 (직접촬영,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 소재)

도시락 폭탄에 대하여 다들 아시는지요? 그럼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을 살해한 의사는 잘 알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살 무렵 농촌계몽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야학당을 설립하여 한글 교육 및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며 농촌 개혁을 실천하였지요. 그러나 한국인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려면 결국 독립운동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1930년 '장부출가 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남기고 가족을 한국에 남기고 홀로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 선생을 만났고,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의 거사를 계획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성공을 위하여 체계적으로 준비하는데, 거사 3일 전인 4월 26일, 자신이 일으킬 의거가 개인의 행동이 아닌, 한민족 모두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의거 장소를 답사하고 폭탄을 준비하였습니다.



 2) 1932년 4월 29일
1932년 4월 29일. 이 날은 일본군에게는 기념적인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날은 일왕의 생일인 동시에1932년 상하이 사변을 빌미로 일으킨 중국과의 전쟁에서 거둔 성공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죠. 일본군은 중국 상하이 소재 홍커우 공원 (홍구 공원)에서 기념식을 가지기로 하였는데, 윤봉길 의사는 이 날은 의거일로 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야채장수로 분장하여 기념식장에 대하여 사전답사를 다녀오기도 하였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 제거용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준비하였죠.
1932년 4월 29일, 기념식장에서 윤봉길 의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묵념하고 있을 때, 단상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 결과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등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깝게도 자결용 물통 폭탄은 불발하여 결국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 해 12월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하였습니다.


 

 3) 의거, 그 후에



 

▲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 (직접촬영)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적으로 끝남에 따라 상하이 임시정부는 다시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었으며,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그의 의거에 감명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게 지원을 약속하였으며,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뛰어난 독립운동군을 양성하도록 도왔습니다. 의거 후 74년이나 지난 요즘, 상하이 홍커우 공원을 방문하였을 때 현지인들 여럿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홍커우 공원은 현재 서민들의 쉼터로 자리잡았으며, 실제로도 봄을 맞아 울창하게 자란 나무와 활짝 핀 꽃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용기 있는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공원 내에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을 조성하여 윤봉길의사의 생애가 담긴 영상을 상영하고 있으며, 작은 전시관을 조성하여 그가 사용하였던 물품이나 그가 작성한 글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 홍커우 공원 풍경 (직접 촬영)

홍커우 공원은 현재 루쉰 공원이라고도 불립니다. 공원 내 루쉰의 묘, 기념관, 일생의 마지막을 보낸 집까지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루쉰 공원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앞으로 우리는 단순히 홍커우 공원 혹은 루쉰 공원이 아닌, 윤봉길 의사의 대한독립 염원이 담긴 홍커우 공원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홍커우 공원을 방문하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현재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 덕분 아닐까 싶습니다. 해방 61년째인 올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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