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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안하고 질문만 하는 교수님 본문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강의하지 않는다. 그의 수업에서 강의의 주체자는 학생이고, 그는 학습자인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이 칠판 앞에 나와 설명하는 동안 권 교수는 앉아있는 다른 학생들처럼 함께 듣고 함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권오남 교수는 학습자 중심의 토론식 참여 수업으로 교수모델을 제시해 '2009 서울대 교육상'을 수상했다. 사진은 서울대 수학교육과 학생들이 전공수업을 받고있는 모습
임경석 서울대 수학교육과 학생(2년)은 지난 학기에 권 교수의 수업 '선형대수'에 대해 들었다. '들었다'기보다 권 교수의 수업에 참가했다는 말이 맞다. 권 교수의 수업은 임 군이 이전에 경험했던 수업과는 전혀 달랐다. 그 동안은 수학적 개념의 이해를 위한 설명식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지난 학기 권 교수의 '선형대수'를 수강신청하면서 이 수업에 대한 선입견도 전의 수업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한 학기 수업을 통해 '선형대수'의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한 학기를 마친 임 군은 '선형대수'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매 수업시간 워크시트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고 다른 학생들과 간혹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선형대수'의 개념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학생들 앞에 지난 수업의 내용을 요약ㆍ설명하면서 실수하기도 했지만, 다른 학생의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섬광처럼 지나간 아이디어를 설명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권 교수의 끊임없는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답을 찾으려고 애썼던 순간, 다른 학생들과 조를 이뤄 아이디어를 모으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던 시간들.... 한 학기 내내 '선형대수'때문에 울고 웃고 힘들었지만 한 학기를 지난 지금,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생각한 한 학기동안 탐구하는 수학자의 모습을 스스로에게서 보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워크시트는 학생들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추론하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모티브가 된다
권 교수는 학습자 중심의 토론식 참여 수업으로 교수모델을 제시, 창의적인 강의로 지난해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교수에게 수여하는 서울대 교육상을 수상했다.
권 교수가 이러한 수업을 하게 된 것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권 교수도 교수로서 강의를 시작한 지 5~6년 정도는 다른 교수들처럼 설명식 수업을 했다. 한데, 이러한 수업이 학생들에게 전달되지 않음을 절감했던 것. 어느 때는 수업시간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원맨쇼같이 느껴졌다. 이때부터 '가르치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며, 기존의 수업방식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론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속에서 탄생한 것이 권 교수 수업의 핵심도구인 워크시트.
권 교수는 매 수업시간마다 워크시트를 나누어 준다. 워크시트는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학습내용과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맥락문제로 이루어진다. 이는 학생들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추론하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모티브가 된다. 워크시트는 권 교수만의 일종의 강의안(?)인 셈. 그날 수업할 내용을 설명식으로 요약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물론 우리 실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원리나 현상을 활용해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으로의 접근을 우선 친근하고 쉽게 재구성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면, 수학자들이 등장하는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든가 소설 '천년비의'등이 권 교수의 워크시트에 나오는 내용이 된다. 처음 워크시트를 만나는 학생들은 '이 내용이 지금 우리가 배울 수학적 개념과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것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어찌 보면 생뚱맞다. 하지만 이 워크시트에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이야기, 현상을 통해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을 이해하게 하려는 권 교수의 의도가 철저히 숨어있다.
오랜만에 수업을 하게 된 '선형대수'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권 교수는 지난 겨울방학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선형대수'를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겨울방학 내내 화두였다. 매 차시마다 학생들이 토의할 워크시트를 만드는 일에 권 교수는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권 교수 워크시트의 특징은 학생들의 현재 위치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기보다 학생들이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의 수준에서부터 출발, 새로운 개념에 다다르게 한다. 학생들은 워크시트를 가지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며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정당화해 나가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선형대수'를 공부하고 싶어 권 교수의 수업을 수강한 김재영 씨(서울대 경영학 석사과정)는 권 교수의 수업방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수학을 추상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구체화된 개념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전 수업이 영어로 진행됐지만 구체적 사실로 시작되는 만큼 영어도 쉬웠고 개념이해도 쉬웠어요."
김 씨는 "경영학에서 데이터를 수집할 때 그래프 상에서 x축과 y축의 상관관계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특히 선형대수의 프로젝션 개념을 배우면서 이를 선으로 도출할 수 있었다."며 "한 학기 수업이 아주 유익했다."고 덧붙였다.
몇 년 전 권 교수의 '미분방정식'을 수강한 한 학생은 "미분방정식 수업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워크시트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는 놀이기구였고, 미분방정식이라는 개념은 놀이터였다는 설명이다. 수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지구물리나 경영학과 학생은 물론 인문계 학생들도 수업을 잘 소화해낼 만큼 권 교수의 수학적 개념에 대한 접근방식은 친근하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왜 그럴까?"라는 의문의 해를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어렵다고만 여긴 수학적 개념은 학생 자신들의 것이 된다. '수학의 발견'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워크시트를 모티브로 추론하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결과를 도출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수학적 개념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권 교수는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수학의 추상적인 개념이 지금 나의 현실에서 어떤 것인가를 반대로 추적해 나아 가다보면 현실과 너무나 밀접한 수학을 만나고 그만큼 현실을 인식하는 깊이와 폭이 확장되지요. 수학을 공부하는 기쁨을 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가르치는 이로서의 충만한 기쁨을 느낍니다. 저의 이러한 수업방식을, 대부분 교사의 길을 걸을 수학교육과 학생들이 앞으로 학교에서 수업할 때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도 듭니다."
권 교수가 앞으로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왜 그렇게 생각하니?"일 뿐이며 그의 워크시트와 과제의 개발은 그가 수업을 진행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추론하라, 자기만의 수학을 만들라'는 권 교수의 가르침을, 권 교수의 수업을 한 학기라도 배운 학생이라면 잊지 못할 것이다.
글|김금실 기자
교과부 웹진 꿈나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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