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 두달 남극에 출장 간답니다"
2009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이끌 진영근 대장을 만나다
 

“불확실한 것 보다 예측이 가능한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진영근(46) 박사가 제22차 월동 연구대 대장으로 선정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극 월동 연구대는 1년에 한 번 남극 세종과학기지로 파견돼 1년 동안 남극에서 활동한다. 남극은 1년 중 6개월이 밤이고 6개월이 낮인 기이한 곳이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며 영하 30도를 넘나든다. 때로는 신기루 현상이 벌어지고 물체의 그림자가 없어지기도 한다. 이런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생사의 여부를 100% 보장하기가 어렵다. 대장은 대원들이 안전하게 1년 동안 작업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함께 무사히 귀국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므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정해진 스케쥴 하에 대원들의 행동을 통제하여 최대한 예측 가능한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성품의 소유자가 대장으로서 적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인터뷰에서 진 대장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책임감”이었다. 그는 대장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안전과 기지를 잘 운영하는 것, 그리고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을 꼽았다. “자신의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는 대장이 좋은 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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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 대장에게 이번 남극 파견이 처음은 아니다. 처음 남극 땅을 밟았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2년이다. 당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진 대장은 우연히 5차 남극 월동 연구대에 들어가게 됐다. “17년 전에는 남극이 어떤 곳일까 하는 막연한 마음에서 갔었습니다.” 이제 진 대장에게 남극은 연구 목적으로 매년 한두 달씩 머무르는 출장소다.


매년 한두 달 씩 머무르는 곳이라 해도 이번에는 1년이나 머물러야 한다.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물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17년 전에도 부모님은 제가 남자라 그런지 큰 걱정이 없었습니다(웃음).” 진 대장은 남극이 위험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3년 고(故) 전재규 대원은 눈보라 속에서 고무보트를 잃고 표류한 다른 대원들 구하려다 순직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가 본격적으로 출범한 1988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차례 일어난 사고였다. 그만큼 남극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 안전하지만 곳곳에 사고 위험이 산재한 위험한 곳이다. 왜 재밌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대답은 단순했다. “남극은 미지의 세계”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죠. 땅 중에서도 가장 미지의 땅인 남극으로.”


진 대장의 어렸을 적 꿈은 천체물리학자였다. “저는 전남 여수 출신입니다. 지금은 엑스포가 개최될 정도로 많이 개발된 곳이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시골이었어요. 그래서 시골의 하늘을 보며 천체물리학자의 꿈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해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대학 1학년 때 자연과학부에 소속돼 공부하다 지구물리학에 끌렸다는 그는 지구물리학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했다. “지구 물리학은 땅을 파보지 않고도 땅 속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는 학문입니다. 엑스레이를 찍어 째보지 않고도 사람의 몸속을 알 수 있듯이 땅을 탐사하는 법이 매력적입니다.” 과연 지구물리학은 미지의 세계에 강한 흥미를 갖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공부 같았다.


진 대장에 의하면 17년 전의 연구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야채를 원활히 공급받지 못해 자칫 잘못하면 괴혈병에 걸릴 수 있었다. “한번은 물이 안 나오는 바람에 이 삼일동안 눈을 녹여가며 버틴 적이 있었다”며 진 대장은 과거를 회상했다. 특히 통신환경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기지 내에 인터넷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없어서 대원들은 인공위성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한 번 통화할 때마다 1분에 만 원이 들어서 한 달에 한 번 3분 통화만이 가능했습니다.” 국내 소식도 한 달에 한 번 배달되는 소포를 통해서나 알 수 있었다. “거의 격리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남극의 겨울은 혹독하다. 24시간 중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이 겨우 1시간 남짓이다. 남극 대원들은 고립된 상태로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야 한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도 되지만 당시의 대원들은 고립된 가운데 ‘격리’까지 감내해야 했던 격이다. 대원들의 상당수가 우울증을 호소하게 마련이다. 이 때 폐쇄된 공간에서 다른 대원들과 24시간 생활하다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진 대장은 “고립된 곳에서 남자들끼리 지내다 보니까 싸움 비슷하게 난 적이 한번 있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과거에 비해선 제반환경 많이 좋아져… 동료들간의 정은 옅어진 것 같아 아쉬워…”

세종과학기지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기에 아껴 써야


지금은 그에 비해선 제반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는 평이다. TV도 볼 수 있고 인터넷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래도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인 법이다. 진 대장은 “예전에는 외부와의 연락이 거의 차단된 상태였지만 그만큼 동료들과의 정이 끈끈했다”고 말했다. “사색하며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볼 시간도 가질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대원들이 많은 시간을 컴퓨터에 쓰다 보니 동료들 간의 정을 쌓을 시간도, 자기 탐구를 할 시간도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요.”


진 대장에게도 역할 모델은 있다. 1992년 당시 파견대를 지휘했던 김수환 박사(현 부경대 교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습니다. 대원들의 자율을 존중해 주었죠.” 그러나 실제 남극에서 대원들의 자율을 존중하는 것은 힘들다. “무단이탈은 절대 금지입니다. 항상 2명 이상이 무전기를 휴대하고 나서야 외출이 허용되지요.” 5개의 가구가 한 데 묶여 마을에서의 무단이탈을 서로 감시하는 조선시대 오가작 통제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절약도 대원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세종기지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껴 써야죠.”


남극에서의 대원들의 일과는 바쁘고 빡빡한 편이다. 1월에 월동 연구대가 세종과학기지에 도착하면 하계 대원들이 100명가량 상주해 있다. 100명의 일을 도와주면서 1월부터 3월까지 배달되는 1년 치의 보급품을 밤을 새가며 일일이 손으로 옮겨야 한다. 주 5일 8시간 근무제가 무색할 정도로 눈코뜰 새 없다. 3월 이후에 조금 한가해져도 17명의 대원들은 돌아가며 근무시간외 당직을 서야 한다.


“1년 중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남극 올림픽도 열어… 축구는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우세”


날씨가 좋으면 짬을 내서 세종 과학 기지 주변의 7, 8개의 외국 기지를 방문하기도 한다. “한겨울에는 근처의 기지들과 함께 남극 올림픽을 열어요. 마라톤, 배구, 탁구, 실내축구 등의 종목으로 승부를 겨루죠.” 가장 우세한 나라는 칠레다. 기지가 가장 크고 가족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브라질은 자국의 명성답게 남극 올림픽에서도 뛰어난 축구 실력을 자랑한다. 세종 과학 기지 앞바다가 두껍게 얼면 얼음에 구멍을 조그맣게 파서 낚시를 하기도 한다. 얼음 위를 유유히 걸으며 바다 위 산책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얼음이 어는 해가 점점 줄고 있어요. 올해는 얼음이 얼었으면 좋겠는데… ….”

 

진 대장에 따르면 남극에서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체감할 수 있다고 한다. 바로 빙하의 움직임을 통해서다. 실제로 진 대장은 세종 과학기지 옆에 있던 빙하가 녹아서 바다에 떠내려 오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 남극에선 온난화의 영향을 받은 빙하의 움직임이 주요 연구 테마다.


“다가오는 2009년 남극 영유권 금지 조항 해제에 대비해야”


올해 2009년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중점적으로 수행할 부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진 대장은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 답변했다. 다가오는 2048년 남극 영유권 금지 조항 해제를 준비하는 차원에서다.책상 옆에 놓인 화이트 보드에 ‘오늘 해야 할 일’이 순위별로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과연 진 대장은 ‘2009년에 해야 할 일’을 모두 달성할 수 있을까. 진 대장의 마지막 한 마디는 소박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담고 있었다. “세종기지에서 대원들과 1년 동안 가족처럼 즐겁게 잘 지내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글 / 사진 : 홍지미(교육과학기술부 블로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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