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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민서포터즈

인문학을 공감할 시간, 그 멋진 세계로의 초대!

대한민국 교육부 2012. 11. 16. 09:00



여러분은 인문학(humanities)’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필자는 ‘사람’ 그리고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답니다. 인문학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스며들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저는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인문학이 매력적임을 느끼고 있는데요. 작품 속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간접으로 경험하고,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며, 또 앞으로 더 나은 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씩 발견하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요즘 일고 있는 인문학의 붐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최근 현대인들은 왜 인문학을 찾고 있을까요? 학생부터 직장인들까지 현대의 많은 사람은 아침부터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만 보며 계속 달리는 삶에 나를 돌아볼 여유는 없지요. 동시에 타인을 돌아볼 넉넉함도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는 않는지요. 때로 인간소외를 느끼기도 하지요. 이렇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아 달라고 당부하며 깊이 있는 통찰과 지혜를 더해줍니다.


 

인문공감, <석학인문강좌>에 다녀오다.

 

이 매력적인 인문학을 모두와 나누고 공감하는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낙엽이 지는 가을, 10월의 끝자락,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인문공감 <석학인문강좌>의 첫 번째 강좌였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좋지 않은 날씨에도,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요구를 한 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많은 분이 강의를 들으러 오셨답니다. 5년간 열려왔던 석학인문강좌는 처음으로 ‘미학’을 다루는 이번 여덟 번째 강연에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특별청중과 일반청중들이 함께했습니다.


< 석학인문강좌가 열렸던 서울역사박물관 >


이번 강연의 주제는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입니다. 인문학과 미술의 접점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미술을 전공하는 후배에게서 듣기로는 미술 작품을 구성하는 데에 작가의 깊은 사색과 탐구가 많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대생들도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접하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인문학은 대표적으로 흔히 말하는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이 인간에 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한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요? 그래서 예술분야가 인문학과 연결된다는 것이 조금 생소할지 모릅니다. 미술과 인문학이 만난다니 호기심을 가지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뜨거운 열기의 석학인문강좌 강연장>


이번 강연을 맡아주신 오병남 교수님께서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님으로, 미학과 철학에 정통하신 석학이십니다. 우리가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통 ‘미술감상’ 혹은 ‘미술사’를 연상해서 미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미술론(이론)’에 관한 것은 매우 없다고 하셨지요. 그렇지만 첫 강연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미술이론이 바로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것 같습니다.

 

르네상스 때 와서야, 비로소 ‘미술’이라는 용어가 정립되다.


< 강연을 진행하시는 오병남 교수님 >

 

미술작품은 오랜 시간 전부터 있었지만, ‘미술’이라는 용어 자체는 르네상스 때 비로소 정립되었다고 합니다. 흔히 미술의 영역에 들어가는 회화·조각·건축 말입니다. 이에 시와 음악을 더해 이들을 미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으로 보았지요. 미술에서 더 나아간 ‘예술’이라는 말은 서구 근대사고의 소산으로, 그전에는 일컫는 말이 정확히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과연 지금 우리가 ‘미술’,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당시에는 어떤 개념으로 이해되었었는지를 아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작품 활동은 그전에도 이루어져 왔었지만, 지칭하는 용어가 없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에 더해, 우리는 서양이 동양보다 예술을 더 많이 애호하고 누리는 것 같이 생각하여 주눅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서양도 길어야 지금으로부터 400~500년 안으로 예술로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미를 추구하는 활동이라 하더라도, 회화·조각·건축과 시·음악은 각각 그 영역이 다른 부류의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시·음악·춤은 ‘불어넣다’라는 의미의 ‘영감(inspiration)’이라는 개념으로 많이 이해되었다고 해요. 이것은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신과의 교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뮤즈 여신’과도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이 뮤즈 여신이 오늘날의 말로 ‘영감’이라고 볼 수 있죠.

 

플라톤, 시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다.


< 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플라톤 >


이후에 플라톤은 과거부터 내려온 사고를 이어받아,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 바깥의 신적인 존재에 의해서 영감을 받는 것이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정신이 아닌 다른 것이 차지하여 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좀 더 나아가면, 다른 말로는 시인을 광인으로 일컬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시각으로서는 참으로 독특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언가에 홀리는 것, 혹은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플라톤으로서는 ‘이성’이나 ‘사유’만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것으로 다소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플라톤은 이러한 본능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음은 인정했다고 해요.

 

이러한 플라톤의 관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학교를 오고 가는 길에 지하철 정거장의 안전문마다 시를 한 편씩 마주하곤 하는데요. 그때마다 지쳐있던 마음에 한 줄기 위로를 받기도 하였는데, 플라톤은 시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권장하지 않았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제가 고등학교 시절, 시를 쓰는 숙제를 두고 시에 필요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다가 제출 시간 전에 매우 급하게 주마등처럼 스치는 어떤 감정과 느낌으로 10분 만에 시를 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로 상을 탔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플라톤의 이야기가 공감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플라톤의 이야기처럼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썼었나 봅니다. 시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지요. 이 매력이 치명적인지라 젊은이들이 더 중요한 것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이것을 장려하지는 않았답니다. 요즘은 시를 읽을 만한 여유도 찾기 어렵고, 오히려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을 북돋워 줄 수 있는 시 감상이 참 중요한데 말이지요! 이러한 ‘영감’이라는 것이 옛날에는 뮤즈 여신에게 해당하는 힘이라 여겨졌었는데, 이후 점차 인간에 내재해 있는 능력으로서 자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대에 와서 이야기하는 ‘상상력’입니다.


회화와 조각, 서러운 사회적 천시를 받다. 그러나...

 

그렇다면, 회화와 조각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이것은 ‘시의 영감’과는 전혀 다른 ‘인간적 활동(human activity)’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인간의 제작활동이라는 것이죠. 음악과 시의 경우에는 신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음악과 시의 여신은 있는데, 회화와 조각은 인간의 활동이라 여신이 따로 없다고 봅니다.

 

회화와 조각은 어떤 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모방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기술자(직인)가 하는 것이라고 보았답니다. 지적인 활동을 거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회화와 조각을 공부하는 많은 친구에게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발언이겠네요! 이처럼 회화나 조각가들에 대한 사회적 천시가 있었는데요.


<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이래로 회화나 조각과 같은 미술 분야가 인문학으로 비로소 인정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를 잘 타고나는 것이 중요할 수 있겠네요. 르네상스 이전에는 예술로서 회화나 조각이 찬미 받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진정 인간적이다.’라는 출발로 휴머니즘은 인간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사고의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그리하여 회화와 조각은 서럽게 천시 받던 상황에서 비로소 시민이라면 배우는 리버럴 아트(liberal arts)의 범주가 된 것이고, 인간의 지적활동으로서 인정되었답니다. 인간의 타고난 지적 능력으로 자연을 파악해보자는 자각이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역사와 비교하여 현대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많은 회화 작품들과 조각들을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가끔은 비싸더라도 기꺼이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향하기도 하지요. 과거의 천시 받던 회화와 조각은 이제 사람들을 직접 찾아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번 강연은 미술이 인간 속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탐구해본 시간이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미술을 감상하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만, 먼저 ‘미술’이라는 용어를 붙여서 미술을 바라보고, 인간의 지적인 산물의 결과로 미술 행위를 여기기 시작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만약 르네상스의 이러한 획기적인 전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다양한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그저 그런 제작기술이 가미된 물건 혹은 그림 종이로만 여겼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네요!

 

인간과 미술이론을 연결지어 생각해 본 색다른 기회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연을 통해 다시금 인문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해볼 기회였습니다. 인간의 탐구활동을 통한 미술작품을 통해 지금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 짜릿한 경험을 하고 있으니 말이죠. 또, 우리는 그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사색과 자기반성에 푹 빠져들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함으로써 그것에 파묻혀 헤어나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이때에 자신의 무력함에 부딪힐 때도 잦습니다. 그러나 사람한테서 나오는 지적활동을 통하여 바로 우리 자신이 원대한 것을 이루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예술을 비롯한 문학과 역사, 철학과 음악, 사회과학 등 인문학이 현대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는 불과 첫 주 시작이었답니다. 아직 풀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 11월 24일까지 5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 강연을 통해 아직 나에게는 먼 것만 같은 인문학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미술을 통해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이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석학인문강좌 강연일정 >

 

인문학이 보다 많은 사람과 가까워지도록 교과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인문학대중화사업>으로 노력하고 있답니다. 다양한 인문학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SNS로 함께 소통해보시길 바랍니다!


 


* 기사에 쓰인 강연사진은 인문학대중화사업 운영위원회 사무국 측에서 제공해주신 사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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