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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풀어내는 우리 역사 본문
문영숙은 어떤 사람이며, 동화작가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나이 50이 넘어 작가 생활을 시작했어요.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을 모셨는데,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님이 노인성 치매에 걸려서 7년을 앓다가 돌아가셨죠. 우리 아이들은 연년생 남매인데, 아이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걔들 고2, 고3 때였어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전부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까 삶이 한가해졌어요. 그래서 무엇을 하지 고민하다가 시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어요.
KBS 문화센터에서 현대시 창작을 공부했어요. 그 후 시인으로 등단했고 수필을 쓰면서 수필가로도 등단했어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긴 이야기를 창작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창작 공부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대학을 못 나왔기 때문에, 대입 검정고시를 통해 2004년에 대학 국문과에 들어가서 2008년에 졸업을 했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시어머님의 치매 간병 일기를 써놓은 것이 있는데, 그걸 2004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출품했어요. 당선이 되었죠. 그때부터 “내가 긴 글에도 소질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스토리가 있는 글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창작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큰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창작 공부를 시작했고, 2005년 문학동네 공모에 당선이 되었어요. 이때 공모했던 작품이 고구려 사신도를 소재로 한 역사 동화 ‘무덤 속의 그림’이라는 작품이에요. 역사 속에서 글감을 찾는 게 의미도, 재미도 있어서 첫 작품을 이 작품으로 정했어요.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의 거장으로 불리고 계신데,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글로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창작에 흥미를 느꼈다고 할까요? 을미사변을 소재로 한 ‘궁녀학’이라든지? 주로 역사적 배경과 역사의 순간들을 접목시켜서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동아일보를 봤는데 일본에 해저 탄광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강제 징용 당한 청년들이 바닷속 해저 탄광에 끌려가서 마치 죄수처럼 착취당했다는 내용이었지요. 이 탄광은 야마구치 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 탄광’인데, 1942년 채판장 채로 무너져서 바다 속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137명이 그대로 묻혔다고 해요. 그 사실을 알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참혹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나만 알고 있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를 통해 알리고 싶었죠.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현장에 답사를 가서 당시에 강제 징용되었던 분들을 만났어요. 그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후 현재 일본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조사를 했어요. 그렇게 쓴 작품이 아동문학에서 최초로 강제 징용을 다룬 소설인 ‘검은 바다’입니다. 소설을 쓰면서 우리나라에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슬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아팠어요.
또 다른 작품은 ‘에네껜 아이들’이라는 이름의 작품인데, 사기 이민으로 멕시코에 팔려간 1033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에네껜 아이들’ 작품을 발표할 때쯤에 한창 TV에서 고려인 강제 이주가 보도되었어요. 1937년. 일제의 강점을 받으며 나라에 아무 힘이 없을 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스탈린에 의해 6000km 바깥으로 버려졌다고 해요. 그냥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보니 참상은 더 심각했어요. 나도 몰랐으니까 우리 청소년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도 무조건 슬픈(?!) 이야기만 쓴 것은 아니랍니다. ‘에네껜 아이들’에서 아이들은 거짓 속임에 넘어가 멕시코로 팔려갔지만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메리다 한인 학교를 세웠어요.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죠.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에서 13살 주인공은 어른들의 정치 싸움에 강제 이주를 당해 멀리 추방을 당했지만, 죽음에 맞닥뜨리는 상황에서도 끈기와 근면함을 발휘하며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고려인 동포가 이어질 수 있었던 거죠. 단순히 아픈 우리 역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힘든 현실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이겨내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아픈 우리의 역사도 치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최재형과 안중근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두 분 사이에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나요?
소설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을 쓰고 연해주에 갔다가 최재형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맞닥뜨렸어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어요.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최대 후원자이고 한인들을 위해서 굉장한 부를 쏟아부었다고 해요.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고, 이 인물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여하고 싶어 최재형 책을 쓰기로 결심했죠.
최재형에 대한 책을 쓰고 나서 최재형 기념사업회가 국내에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기념사업회는 최재형의 친인척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최재형에 대해 감동을 받은 네 분들로 구성되어 있었죠. 저는 이들로부터 최재형 홍보대사 제의를 받아 일을 해오다보니 지금은 최재형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라는 일까지 맡게 되었답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하얼빈 의거의 배후 인물이 누구냐라고 취조를 받았는데, 안중근은 끝까지 최재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모든 독립운동의 태동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최재형 선생의 휘하로 모두 이루어졌는데, 안중근이 최재형을 말하게 되면 당시 항일 독립단체가 모두 와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안중근은 최재형에 대해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을 내고, '동양평화론'이라는 사상서를 쓸 때에 어디에도 최재형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요.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을 했다는 내용만 나왔죠. 나중에 일제가 안중근에게 집요하게 배후세력을 물으며 고문했을 때, 안중근이 ‘김두성’이라는 이름을 대요.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독립운동가는 없었어요. 역사학자들도 기록에 없으니까 밝힐 수가 없는 거죠.
하지만 당시에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하고, 밀하이로프 변호사를 보내고 대동공보를 해서 모의하는 등, (당시 대동공보의 사장은 최재형이었다.) 안중근 의거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재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최재형 밖에 없다고 판단해서 '안중근 의사가 말한 김두성은 최재형이다'라고 보고 있는 거예요.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교과서에 등재하고 그의 삶과 과업에 대하여 청소년들에게교육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요?
최재형선생은 1920년 일본이 저지른 사월참변으로 4월5일에 체포되어 4월7일에 일본군의 총탄에 순국하셨습니다. 그후 가족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가게되죠. 그래서 현장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아쉬워서 책을 통해서라도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현재 교수님들이 쓰는 학술서와 같은 경우에는 전문성이 있어서 일반학생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저는 교육 자료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쓰고 있어요. 제가 또 그런 쪽에는 장점이 있는 것 같고 제 책은 아이들이 책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된다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 현장에 대한 흔적을 알리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죠. 앞으로도 쓸 글들이 많아요. 사할린 문제라든지, 하와이 사진 신부 이야기라든지 또 고려인에 대해 초기, 중기, 현재까지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를 써볼 계획이에요. 아직까지는 구상만 하고 있답니다.
후대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교육, 어떤 게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연도표를 만들어서 무작정 역사는 암기 과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교육보다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활로를 제공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SNS 매체를 통해 교육되고 역사적인 사건들이 재조명될 수 있도록 교육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통일을 앞두고 있지만, 통일에 대해 역사적인 지식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재형은 내가 알면 알수록 많이 알려져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제가 연구할수록 계속 드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내년에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이고 초대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임명될 정도면 임시정부의 주요 핵심 요인이었고 2020년에는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이기 때문에 최재형에 대해 다시금 큰 재조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대인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요?
요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디아스포라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진취성, 근면 등 우수한 DNA를 느꼈어요. 역경과 굴곡 그리고 아픔을 이겨낸 선조들의 슬기로운 지혜를 배우면서 역사를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알면서 대처하는 것과 역사를 모르고 대처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역사를 모르고 대처한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기성세대 사이에 더욱 깊은 골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나간 역사를 알아야 해요. 역사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 나갈 젊은 세대에게 주춧돌이 될 수 있어요. 고루하게 역사를 암기하고 연대를 외우는 식이 아니라 재밌는 스토리를 통해서, 아니면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뮤지컬 등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 배우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역사 속에 들어가서 그 시대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볼 수는 없지만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미래의 거울로 삼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이번 기사 주제가 ‘올바른 역사 교육의 방향과 지향’인데, 혹시 ‘역사 교육’에 관련해서교육부에 요구하고 싶은 점이 있으신가요?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교과서 등재’예요. 최재형 하면 따라오는 수식어가 정말 많은데, 최초로 1800년 대 세계 일주를 2번이나 한 사람이고 기업인으로서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에요. 많은 돈을 벌어서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을 위해 몽땅 쏟아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에요. 그래서 어른들, 특히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에요. 그래서 이런 분들을 국가적 차원에서도 많이 알리고 홍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부분을 교육부에서 인지를 하고 우리나라에 그렇게 멋진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렸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최초의 독립운동 유적지가 서울에서 2시간 반 정도만 날아가면 있어요. 중국보다도 더 가까워요. 교육부에서 학생들에게 과거 독립운동의 행선지를 따라 탐방을 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부여했으면 좋겠어요. 현재 최재형 고택은 대한민국 정부가 구입해서 ‘최재형 기념관’을 짓기 위해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어요. 내년에 개관이 예정되어있죠. 현장에서 과거 역사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거예요, 단순히 책이나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끼기보다는...
놀러 가는 여행도 물론 큰 좋은 추억이겠지만, 역사 탐방 같은 여행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해보는 역사 교육의 기회는 물론 아이들의 호연지기를 키울 수도 있는 좋은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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