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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잔해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2) 본문

~2016년 교육부 이야기/신기한 과학세계

거북선의 잔해를 발견할 수 없는 까닭(2)

대한민국 교육부 2010. 1. 6. 10:07

세 번째는 거북선이 과연 세계 최초의 철갑선일까 하는 문제이다. 일전에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TV 광고가 화제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지난 1986년 정주영 회장이 중앙대학교에서 행한 특강 장면을 편집한 이 광고는 현대 조선소 건립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과 5만분의 1짜리 지도를 보여주고는, ‘내가 여기에 조선소를 지을 테니 일단 선박 주문부터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말은 정주영 회장이 그리스 선박왕인 리바노스 회장을 만나 조선소를 건립하기도 전에 유조선을 수주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리바노스를 정 회장에게 소개시켜 준 사람은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이었다.

1971년 9월 조선소 건립에 필요한 차관 도입을 위해 정 회장은 영국 런던으로 롱바톰 회장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처음에 롱바톰 회장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차관을 제공한단 말인가.

면담이 진척 없이 마무리될 상황에서 정 회장은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롱바톰 회장 앞에 펼쳐놓았다.

“이 지폐에 그려진 그림을 보시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오. 우리는 당신네 나라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우리는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이 말 한마디에 롱바톰 회장은 마음을 돌렸고, 오늘의 현대 조선소가 있게 되었다. 이처럼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많이 소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왜군이 쏘아대는 포탄과 조총을 거뜬히 막아내며 적함을 단번에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은 철갑선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해전 상황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우리나라의 사료 중 어디에도 거북선을 철갑선이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에 의하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시초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왜장 도노오카의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선전기는 도노오카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기록문으로서, 한산대첩과 안골포해전의 실전 상황을 그리고 있다. 

“8일 안골포의 오도항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 진시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盲船 ;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유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여기서 ‘철로 요해하여’라는 대목이 바로 철갑선설의 시초라는 주장이다.

이 기록은 다시 1831년 발간된 일본의 ‘정한위략’이라는 책에서도 인용되었는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철갑선설이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를 합리화하는 데 적절한 구실이 되는 셈이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근거는?
 

남천우 전 서울대 교수도 ‘이충무공전서’ 등 각종 사료를 면밀히 고찰한 결과 당시 거북선의 배수량은 약 65톤인데, 만약 철갑을 입혔다면 전체 균형이 무너져 배가 뒤집어졌을 가능성조차 있었다며 철갑선설에 대한 반박 주장을 펼쳤다.

또 장학근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등에 쇠못을 꽂았다’ ‘거북선 판자 덮개에 거북선 무늬를 그렸다’ 등의 기록이 철갑선설의 유일한 근거라며,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고 갑판을 나무판자로 덮은 군함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이를 추정할 만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751년(용조 27년) 2월 21일 영남균세사 박문수가 영조에게 전선(戰船)과 거북선의 제도를 아뢰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선은 매양 개조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하기가 어렵고 거북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는 몽충(艨衝 ; 좁고 긴 싸움배)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화살과 돌을 피했습니다.” 

즉, 거북선의 덮개는 철이 아니라 두꺼운 판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전체적으로 철갑을 두른 배는 있을 수 없고,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상부에 부분적으로 철판을 대고 그 위에 쇠못을 꽂은 것만으로도 철갑선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

마지막으로는 거북선이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 해군사관학교와 전쟁기념관 등 전국에 전시된 거북선의 모형은 모두 2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1795년에 난중일기 등을 토대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앞부분에 실린 거북선의 간략한 그림을 보면 2층 구조에 가깝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따르면 맨 아래층인 1층은 군량미와 무기고 등의 군수 창고 및 침실 등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2층은 노를 젓는 격군과 활을 쏘는 사수, 포를 쏘는 포수 등이 함께 모여 전투를 치르는 활동 공간이었다는 것. 

하지만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거북선이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 공간과 포를 쏘는 전투 공간이 확연이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에 의해 거북선은 판옥선처럼 노를 젓는 공간과 전투공간이 분리된 3층 구조설이 대두되어 논쟁의 쟁점이 되어 왔다. 

그런데 2004년 8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거북선의 실물을 묘사한 고서화 한 점이 공개되었다. 이 그림을 소장한 이에 의하면 1867년 일본 니기타현 인근의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었다는 것.

가로 176㎝, 세로 240㎝의 비단에 그려진 그림에는 판옥선 한 척과 거북선 네 척이 화려한 채색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속의 거북선에서는 노를 젓는 공간의 위층에서 대포를 장착하고 무언가 작업을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즉, 이 그림 속의 거북선은 3층 구조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약 200년이 지난 1790년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거북선의 내부 구조가 임진왜란 당시는 2층이었지만 18세기에 제작된 거북선은 3층이었을 거라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기도 했다.


   칠천도 해역에서의 거북선 탐사 작업
 

최근 경상남도는 2012년 여수엑스포 기간에 여수 신항 일원에 전시하고, 전국에서 열리는 이순신 관련 행사에 순회 전시할 거북선을 전국 최초로 3층 구조로 복원한다고 밝혔다.

거북선에 얽힌 수수께끼가 이처럼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유명세와 달리 거북선과 관련된 역사 자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거북선의 실물을 직접 발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를 위해 경상남도는 2008년 6월부터 2009년 7월까지 거제 칠천도 해역에서 거북선의 수중탐사 작업을 펼쳤다. 첨단장비를 동원하고 관련 사학자들의 고증을 받아 수심 12~20m의 뻘층 하부까지 뒤졌지만 결국 거북선을 찾지는 못했다.

▲ 미국 뉴욕에서 공개된 고서화 속의 거북선 모습

거북선의 발굴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문화공보부가 1973년부터 1978년까지 탐사 작업을 벌인 이후 해군에서도 1998년까지 발굴조사단을 운영했지만 끝내 거북선은 찾지 못했다. 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배는 격침당한 적이 거의 없다. 경상남도가 거제 칠천도 해역에서 거북선 탐사 작업을 벌인 것은 원균이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파면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전투 때 일본군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지 않아 그들의 등선육박전에 휘말려 버렸다. 그러다 육지까지 쫓겨서 전선 대부분과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대의 배를 격침시키는 조선군의 전법과 달리 일본군은 상대 배에 올라 인명을 살상하고 배를 나포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따라서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를 했다고는 하지만 거북선이 격침되었을 가능성을 그리 높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별다른 소득 없이 탐사활동을 마친 경상남도는 예산 확보가 되는 대로 올해부터 다시 2차 탐사를 펼칠 예정이다. 또한 다른 기관 및 단체에서도 앞으로 바다 속에 묻혀 있는 거북선의 잔해 발굴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거북선이 앞으로도 발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북선에 얽힌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부서진 채 뻘 속에 묻혀 있는 거북선의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거북선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무적 함선으로 남아 있어야 하니까….

 한국과학창의재단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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