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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 대해 알아보아요 창덕궁은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던 궁궐의 하나이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있으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후원인 비원까지 합해서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요 문화재이다. 태종 초에 별궁으로 지었는데 계속하여 궐내에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선정전ㆍ소덕전 등 여러 전각과 돈화문을 세워 본궁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다른 궁과 함께 거의 불타 버리고 말았다. 1608년에 왕이 된 광해군은 1615년에 불타 버린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다시 지어 여기에 머물렀다. 이 때부터 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정궁 구실을 하였다.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궁도 인조 반정과 몇 차례의 화재로 헐고 다시 짓는 등..
경복궁내에 건물과 쓰임새 조선 제일의 궁궐 경복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궁궐로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에요. 경복궁의 뜻은 시경에서 ‘왕과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와서 지은 것이랍니다. 각 건물의 이름과 쓰임새경복궁 내의 각 건물에는 유교의 정신을 담아 이름을 지었어요. 예를 들어 국가 행사를 치르거나 임금과 신하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던 근정전(勤政殿)은 나라 다스리는 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뜻이 담겨있고, 임금과 신하가 모여 회의를 했던 사정전(思政殿)에는 깊이 생각해서 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경복궁의 각 건물의 이름과 그 의미를 알아봅시다. 경복궁은 조선시대 내내 왕이 ..
경복궁 배치도 경복궁은 조선 시대의 궁궐로 북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태조 3년(1395년)에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린 것을 1867년에 흥선 대원군이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일본 침략기에 일본이 대부분 건물을 헐어 버리고, 광화문을 옮긴 뒤 근정전 앞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찾기 힘들게 되었다. 초기의 경복궁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네모난 울에 둘러싸여 있었다. 궁 앞에는 광화문, 북쪽에 신무문, 동쪽에 건춘문, 서쪽에 영추문을 세웠다. 정전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남문인 근정문을 비롯한 네 문이 있었다. 그 북쪽의 사정전은 임금이 거처하며 정사를 돌보던 편전이며, 강녕전ㆍ교태전 등의 침전과 여러 건..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에 대해 알아보아요. 흥선 대원군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개혁 정치를 실시한 이유세도 정치로 인해 조선이 기울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음서양 세력의 위협을 이겨 내고, 세도 정치로 인해 약해진 조선을 바로잡으려면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음아들인 고종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자, 흥선 대원군은 그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음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 ▶ 인재 등용부패한 관리를 내쫓고, 능력 있는 관리를 고루 뽑았음▶ 서원 철폐이유:서원이 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하고 당쟁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에 서원을 40여 곳만 남기고 대부분 없앴음▶ 호포제 실시평민에게만 내게 하던 세금을 양반에게서도 걷었음 경복궁 중건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흥선 대원군이 다시 지었음 백성들의 반응* 개혁 정..
경복궁에서 찾은 우리 조상들의 예술과 과학 경복궁은 사적 제117호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입니다. 경복궁에 우리 조상들의 예술과 과학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찾아 설명하려 합니다. 경복궁은 1395년에 왕이 머물 공간이 필요해 지어졌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경복궁은 가장 많은 아픔을 겪은 궁궐입니다. 조선의 건국과 번영, 그리고 멸망까지 함께한 경복궁경복궁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 조상들과 예술과 과학도 함께 찾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서울에 궁궐이 왜 5개나 될까요? 원래 있던 궁궐에 사고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옮겨갈 수 있도록 예비 궁궐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요.법궁 : 임금이 머무는 궁궐 → 경복궁 → 경복궁-창덕궁 → 경복궁-창덕궁-덕수궁이궁 : 옮겨갈 수 있는..
조선 왕실의 기록 문화프랑스에 의해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2011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특별한 전시가 열려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바로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외규장각은 1782년 정조가 강화도 행궁에 세운 왕실도서관입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던 의궤 중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 책봉식을 기록한 '효장세자 책례도감 의궤', 숙종이 인현왕후를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숙종 인현왕후 가례도감 의궤' 등 많은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에 의해 약탈된 지 14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이 이루어진 것은 오랜 시간 의궤의 반환을 위해 애쓴 역사학자 박병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로 유학길에 오를 때 빼앗긴 책을 찾아보라는 스승의..
서양 고지도의 독도 ■ 조선왕국전도 ▲조선왕국전도(1732)(출처: 동북아 역사재단) 프랑스의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제작한 한국 지도입니다. 울릉도(鬱陵島)를 Fan-ling-tao, 독도 [于山島] 를 Tchian-chan-tao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독도가 바르게 표기되지 않은 것은 우산도(于山島)의 우(于)를 천(千)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도가 내륙 가까이에 표시되어 있지만 한국의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조선전도 ▲조선전도(1846)(출처: 동북아 역사재단)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외국 선교사들을 위해 만든 한국지도로 지명을 라틴어로 표기하였습니다.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 영사 드 몽티니에게 이 지도가 전달되면서 한국이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도에서 울릉도는 Ou..
일본 고지도의 독도 ■ 삼국접양지도 ▲삼국접양지도(1785)(출처: 동북아 역사재단) 1785년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도설』에 첨부된 5장의 부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도에서 국가를 구분하기 위해 조선은 황색, 일본은 녹색 등으로 채색을 달리했는데요. 울릉도와 독도는 한반도와 같은 황색으로 채색하였습니다. 또 그 옆에 “조선의 소유다 [朝鮮ノ持也] ”라고 적어 이들 두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 조선동해안도 ▲조선동해안도(1876)(출처: 동북아 역사재단) 러시아 해군 팔라다호의 장교들은 1854년 한반도 동해안을 세밀하게 측량했으며, 그 성과로 해군부 수로국은 1857년에 「조선동해안도」 를 제작했습니다. 이 지도를 바탕으로 일본의 해군 수로부는 1876년 「조선동해안도」 를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