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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교육부 이야기/신기한 과학세계

뉴턴의 만유인력은 우연? 아인슈타인은 낙제생?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21. 11:00


많은 사람이 학창시절 과학을 공부하며 느낀 어려움 때문에 ‘과학은 어렵다’, ‘입시를 위해 공부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과학을 일반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 천재적인 사람만이 하는 분야라고 여긴다. 

여기서 떠오르는 천재적인 과학자 로 대표적인 인물이 뉴턴과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과연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연히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아인슈타인이 낙제에 가 까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상대성이론을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순간적인 영감과 남다른 천재성 때문일까?

평소 과학에 관심이 많고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순 간 적인 영감으로 과학역사에 길이 남을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낙제에 가까울 정도로 성적이 나빴던 아인슈타인이 남다른 천재성으로 상대성이론을 개발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과학을 할 수 없는 것일까?’하는 회의가 들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창의적인 면모, 상상도 하지 못할 번뜩이는 아이디어,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독창성 등이 있어야만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며 상식처럼 전해지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야기에 미리 좌절할 필요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잘못된 상식이기 때문이다. 뉴턴의 과학적 창조성은 타고난 천재성과 순간적인 영감에 의한 재능이 아니고, 아인슈타인도 성적이 비교적 좋았을 뿐만 아니라 수학의 경우 뛰어난 편이었다.




 뉴턴, 사과 일화부터 만유인력 탄생까지 걸린 시간, 20년
 

뉴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앞서 얘기한 ‘만유인력과 사과’일 것이다. 이 사과 일화는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인 1665~1666년 사이의 일이다. 이 시기에 뉴턴은 대학생 이었으며, 흑사병을 피해 잠시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 

어느 날 사과나무 아래에서 ‘달의 운동’과 관련하여 ‘실에 매달려 회전하는 돌은 실 때문에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지만, 달은 지구와 연결된 실이 없는데도 지구 주위를 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사과를 떨어뜨리는 중력이 달 또한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묶어 두는 것은 아닐까?’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이 아이디어를 얻고도 20년이 지난 1687년에 저서인 『프린키피아』를 발표하며 만유인력의 개념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만유인력의 탄생까지는 데카르트, 후크, 핼리, 갈릴레오, 보일 같은 인물들의 지적 자극이 도움 되었다고 한다.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유무형의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결과로 만유인력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말이다.

또한, 18세기 계몽사조 시대에는 천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감과 상상력을 발휘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만드는 사람 ’ 으로 인식했기에, 뉴턴의 후계자들은 뉴턴의 근면성과 노력보다는 상상력, 직관, 추측을 강조했다고 한다. 끈질기게 학문을 파고드는 과학자 뉴턴 이 아닌 정상을 벗어난 부분이 강조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이 ‘사과 일화’를 더욱 크게 부각하게 만들었다.

뉴턴이 천재적인 과학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막히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 시 읽는 끈질긴 근성, 기존 지식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 다양한 지식에 대한 흡수력과 그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 이러한 모든 것을 추구하는 끈기와 지칠 줄 모른 열정은 간과 되고 있다.




 아인슈타인, 수학과 자연과학을 덜 중시하던 학교에 다닌 학생
 

아인슈타인이 학창시절에 성적이 좋지 않았고 고등학교 중퇴, 대학입시 실패, 졸업 후 구직난까지 처했었다는 내용은 널리 알려진 상식처럼 취급되고 있다. 깊은 사고와 오랜 학습 이 있어야 하는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업적을 이룬 사람이 학창 시절의 성적이 낙제에 가까웠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관심을 둘 만하다.

아인슈타인이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에 비해 성적이 뛰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이유로 성적이 좋지 못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간과되어 있기에 이 또한 잘못된 상식이 아닐까?

그가 입학한 9년제 ‘김나지움’이라는 학교는 인문적 성향이 강해 라틴어나 후기 그리스어 같은 고전어 수업에 치중하고, 수학과 자연과학은 상대적으로 덜 중시하던 곳이었다. 

이 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은 선생님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리스어 과목에서 숙제를 부실하게 해 갔을 때 해당교사가 아인슈타인에게 “장래에 쓸모 있는 인물 이 결코 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한 교사가 7학년의 담임선생님이었던 것이 아인슈타인이 학교를 견디지 못하고 중퇴하게 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학교의 특징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전체적으로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했으나 수학에서는 줄곧 높은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학교를 중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학과 관련한 시험 에서는 응시자 가운데 최고 성적을 받았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김나지움의 교사들은 탐색하고 반추하는 능력보다는 이미 정해진 해답을 재생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기에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견조차 못 했으니 북돋우며 성장시킬 수도 없었던 것이다.


글 | 김시훈 자유기고가
 한국과학창의재단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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