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공식 블로그

율곡선생유적지에서 얻은 깨달음 본문

교육부 국민서포터즈

율곡선생유적지에서 얻은 깨달음

대한민국 교육부 2013. 8. 8. 11:00

어느 날 동생이 기말고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한국사 교과서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도 때마침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던 터라 그동안 공부했던 지식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유적지를 글자로만 배우는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방학의 여유 있는 시간을 이용할 겸, 유적지 몇 곳을 가보기로 계획했습니다. 먼저 제가 사는 고장인 파주의 유적지 ‘율곡선생유적지’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율곡선생유적지>

‘율곡선생유적지’는 파주시 법원읍에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곳에 현장학습으로 와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어릴 때 갔던 것과 달리 이 유적지가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율곡이이 선생이 어떤 학문을 하였고, 그 학문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 윤리나 한국사 과목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유적지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율곡선생유적지 입구>

국가사적으로 승격된 <파주이이유적>

경기도 문화재였던 이곳은 2013년 2월부터 가사적 제525호 <파주이이유적>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곡 이이 선생의 성장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고 율곡 이이 사후에 그 덕을 높이기 위한 서원이 세워졌던 곳이지요. ‘율곡선생유적지’에는 대표적으로 자운서원, 여현문, 이이 선생과 신사임당의 묘, 신도비 등이 있습니다. 먼저 율곡기념관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율곡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율곡기념관><율곡 이이 선생의 초상화>

율곡기념관에 들어서서 먼저 만나게 된 율곡 이이 선생의 초상화에서 매우 진지한 학자의 기품이 깊이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기품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관람하러 오신 분들과 함께 종합 영상실에서 그 생애를 보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학자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말과 글을 깨우치고 8살에는 풍광을 보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아홉 번의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니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이렇게 두루 갖춘 탁월함을 후 국가를 위해 고뇌하고 실천하는 일에 사용하였다는 입니다. 왕에게 충직한 신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던 이이는 그만큼 많은 상소를 통해서 왕을 보필해 국가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매우 노력하였던 것 같습니다. 

<구도장원공이었던 율곡 이이>

이러한 이이에게 성장 과정부터 많은 영향을 주었던 분은 바로 그의 어머니 사임당입니다. 신사임당의 그림과 글솜씨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영감을 줄 정도입니다. 정갈한 글씨와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보면서 이러한 교양과 예술적 재능이 자녀들에게도 고루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의 학문자녀와 소통하는 길도 터주고, 더불어 자녀의 경험 폭을 넓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신사임당의 매화그림>


<격몽요결><구용(九容)과 구사(九思)>

“아, 이거 윤리 수업 때 배웠던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다!” 반가운 마음으로 보게 된 것은 바로 <격몽요결>의 이 내용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것을 그 옛날 성리학자의 엄숙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구용(九容)은 바쁘고 시간에 쫓기는 현대 사회에서는 지니기 어려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걸음걸이를 무겁게 하고, 손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소리는 조용히, 숨쉬기는 정숙히 하는 등 이 모든 것을 행할 때 어떤 상황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 굳건함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갈수록 분주함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나와 내 주변의 것을 돌아보는 인문학적 반성과 사유의 시간을 제공해주기도 하고요.

 

구사(九思) 중에서는 ‘의문이 있을 때는 물을 것’이 학생인 저로서는 염두에 두고 배울 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묻는 것’은 누구라도 모른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배움에서 ‘최선의 성실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의에 합당한 연후에 얻을 것’이라는 말 또한 내가 이익을 취하려 하기 이전에 이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궁극적인 것, 가장 중심이 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경문 - 스스로 경계하는 글>

이후에 보게 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에서도 이이 선생이 공부하며 얼마나 자신을 바로 세우려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쓰는 다짐의 글과도 같은데요. 정말 청년인 제게 있어서도 아로새길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경문의 1조>

1조.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으로서 표준으로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 동안은 내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니라.


11조. 공부에 힘쓰되 늦추지도 말고 보채지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만일 그 효과가 빨리 나기를 구한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라. 만일 이같이 아니하면 어버이에게 물려받은 몸뚱이를 욕되게 함이라. 그게 바로 사람의 아들 된 도리가 아니니라.


율곡 선생의 자경문을 보니, 공부하는 뚜렷한 목적을 바로 알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습니다. 특히 목적 없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뜻을 크게 가지는 공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함보다는 ‘이것이 나를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스스로 많이 던져보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공부라는 것이 결코 이른 시일 내에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며 인내를 가지고 정진할 것을 당부하는 것 같았습니다.

<교육의 쇄신을 위한 학교모범 16조>

교육을 전공하는 저로서는 이이의 ‘학교모범’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청소년 교육을 쇄신하기 위한 교육헌장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네요. 배우는 자의 태도와 자세를 조언하는 것으로, 요즘 학교와 가정에서도 이러한 교육의 필요성이 느껴지니 과연 배운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요구되는 필수적인 자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기에 대해 논쟁한 이황과 이이

<퇴계 이황이 이이에게 보낸 당부의 시>

성리학에서 정신과 이상을 나타내는 이(理)현실과 물질을 나타내는 기(氣), 이에 대한 이황과 이이의 논쟁은 매우 유명합니다. 그러나 50대 후반의 이황과 20대의 청년 이이의 논쟁은 결코 논쟁으로만 끝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황은 정신과 윤리에 주목하고 이이는 이(理)와 함께 기(氣)의 가치인 현실과 경제를 중요시하며 견해차를 보였지만, 이러한 생각의 차이를 서로 나누고 존중하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이는 사람들이 이이를 통해 새로운 앎을 얻게 될 것이라 말하는 ‘퇴계 이황이 이이에게 보낸 당부의 시’에서도 알 수 있는 바였습니다.

 

나라를 위한 마음

학자로서의 명성도 대단하지만,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도 매우 컸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고, 정치적으로는 붕당의 당쟁을 막으려 하며, 10만 양병설로 국가적 위협에 대비하려는 모습 등을 보입니다. 실제로 이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앞서 보았던 ‘현실’을 매우 중시한 율곡으로서는 정치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국가가 점점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도모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현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했던 자운서원

<문성사><400년 넘는 느티나무와 강인당><자운서원 묘정비>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인 수양재><유생들이 기거하던 입지재>
한국교육사라는 전공 수업을 들을 때에 '서원'에 대해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서 자운서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글자로 배웠던 것들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운서원은 율곡 선생의 사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학자로서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문성사에는 학덕이 있는 선현을 모셨고, 강인당은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자운서원은 곧 작은 학교라고 할 수 있지요. 수양재와 입지재라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도 있었습니다. 자운서원 안에 400년이 넘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그 유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운서원 안의 묘정비와 신도비는 각각 자운서원의 건립과 율곡 이이 선생의 일대기가 담겨 있었는데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든 후에 나 자신의 일대기를 써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요.

<율곡의 일대기가 기록된 신도비>

율곡선생유적지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옛 성리학자의 학문적인 노력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습니다. 늘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을 정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나라와 백성들을 생각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선현의 성장배경이 되었던 곳이 우리 고장에 있으니 더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대에 학생으로서 뜻을 세우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 묵직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