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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리스트를 만든 1급 시각장애 선생님

대한민국 교육부 2010. 1. 21. 10:29
“시력은 잃어가고 있지만 
아이들 향한 열정까지 잃을 순 없죠”


용산공고 기능반 학생들이 만든 벽돌작품에 기대선 구만호 교사


지난해 9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조적분야(벽돌쌓기)에서 이태진 군(19, 용산공고 졸)이 영예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그가 아닌 그의 기술 지도를 맡은 구만호 교사(48, 용산공고 건축디자인과)였다.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분야에서 정상인의 지도로도 쉽지 않은 일을 시각장애1급인 구 교사가 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갈 기적은 이제 시작이다. 눈은 점점 어두워져도 그의 열정만큼은 결코 어두워질 줄 모르고 있기에.

“사실 저는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눈이 불편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따라갈 수 있었던 것뿐인데 그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좋게 비춰진 것 같아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조적(벽돌쌓기)’ 분야에서 세계 금메달리스트를 탄생시킨 구만호 교사. 거기에 ‘올해의 스승상(교육과학기술부)’과 ‘모범공무원상(국무총리실)’까지 수상하는 겹경사를 치렀다. 용산공고에서 기능반을 담당한 5년간 전국기능대회에서 단 한 번도 메달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기능지도에 남다른 사명감을 갖고 있는 그에겐 기대하지도 않았던 너무도 큰 선물이었다.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보이기 시작하다
 

“95년도에 대학원 논문을 진행할 즈음 글이 잘 보이지 않아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선생님이 ‘곧 눈이 멀 것’이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서랍 속 명함을 꺼내주더군요. 맹인용품을 취급하는 회사명함이었어요. 그 친절을 고맙다고 해야 할지…. 볼 때마다 서운한 생각에 결국 그 명함을 과감히 버렸지요.”

구 교사의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대학원 논문 마무리와 함께 문제집 진행 등 활발한 집필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병명은 망막세포가 퇴행하는 ‘망막세포변성증’. 

눈이 멀어가는 충격에 ’98년 교직을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하던 찰나, 미국을 방문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부정적인 마음을 180° 돌려놓고 귀국했다. 우연히 만난 의사로부터 “죽을 때까지 소경하지 않을 수도 있고, 눈이 멀다 해도 좋은 장비들이 많으니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 한마디를 들은 후였다. 

실제로 그 후 구 교사는 다양한 시력보조장치를 이용해 학교에서 수업 및 실습을 거뜬히 지도하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일반 글씨를 주먹만 하게 키워주는 장치 덕’이라며 웃으면서 주먹을 쥐어 보인다.     

“주인 잘못 만난 무릎이 고생이죠. 앞이 잘 안 보이니 무릎이 성할 날이 없어요. 그러고 보니 이마도 만만치 않네요. 투명한 유리를 못 보고 지나가다 부딪히는 날이 많은데 이젠 꾀가 생겨서 항상 손을 먼저 내밀고 걸어 다닙니다.”

그의 무릎에 남은 깊은 상처와 꿰맨 수술자국이 그의 지난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젠 눈앞에 있는 사람도 형체만 보일 뿐 성별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시력이 약화됐지만 불편하긴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그의 말엔 여유마저 묻어난다.   



   제자 학비 위해 ‘구두닦이’로 나서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울면서 저를 찾아와 집안형편이 어려우니 장학금을 받을 수 없냐고 물어보더군요. 도와줄 방법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지저분한 제 구두를 보게 됐고, 다른 교사들도 저같이(?) 구두를 잘 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교감선생님께 ‘구두닦이’를 제안했죠.”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인 과학을 살려 ’85년 용곡중 과학교사로 초임을 시작한 그는 ‘구두닦이 선생님’으로 불리던 아련하고도 풋풋한 추억을 떠올린다. 구두닦이로 제자 학비를 마련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목공소 아저씨와 구둣방 아저씨로부터 구두통과 기술까지 후원받고 개시준비를 완료한 것.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창피하다며 그를 피했고, 혼자 구두닦이를 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고서야 아이들이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심시간과 방과후 시간에 이뤄진 구두닦이는 그가 재직한 3년 중 무려 2년 6개월 동안 지속됐을 정도다. 

초반에는 여교사의 흰 구두에 검은 약을 칠하는 실수도 하고, 학부모들에게 장가 밑천이 없어서 구두 닦는다는 소문이 잘못 퍼지면서 학교로 찾아와 돈을 쥐어주고 가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교사들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3명의 학비를 거뜬히 해결했다. 

아련한 추억도 잠시, 넘치는 의욕으로 초임교사 시절을 보낸 그에게 시각장애가 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15년 전 눈이 잘 보이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런 생각을 종종 하지만 신이 시력을 가져가는 대신 또 다른 능력을 주는 것 같아요. 나를 위해서만 열심히 사는 게 아닌 넘치는 제 열정을 다른 데 쏟게 하는 것이죠.” 

구 교사는 시력이 떨어지면서 비로소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그들이 고민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다며, 앞으로 그와 같은 시각장애 등 신체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위해 남은 교사 일생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장애학생 직업개발 및 진로지도 돕고파
 

“앞으로 교육청 산하 특수교육지원센터와 같은 곳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지원하거나 관련 시스템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특히 시각장애인들은 안마업에 주로 종사하는데,  장애학생들도 일반 사람들과 더불어 다양한 직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진로지도하고 싶습니다.”  

전문계고에서만 20여 년을 몸담아 온 구 교사는 동료교사들 사이에서 ‘취업의 달인’으로 통한다. 타 학교 교사들이 구 교사에게 학생 취업을 부탁하는 데다, 대학을 졸업해도 입사하기 어려운 회사는 물론, 구 교사를 신뢰하는 기업에서 먼저 추천 요청이 들어올 정도다. 추천할만한 학생이 없을 때는 한 해에 단 한명의 학생도 추천하지 않을 만큼 나름 깐깐한 기준으로 아이들의 취업과 진학을 상담해 주고 있다. 

구 교사는 이러한 그만의 특기를 살려 장애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직업 개발과 함께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을 실시해 사회로 진출시키고 싶단다. 보다 체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올해부터 특수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며, 이미 2003년에는 전문상담교사 자격증도 취득해, 진로지도에 앞서 아이들의 마음을 먼저 치유하는 데 주력하고 싶다고 한다.


 
   내 눈이 되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
 

“눈이 멀어가는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는데 어느 날 청각에도 이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눈이 먼다는 말보다 더 충격이었어요.”

‘눈이 안 보이니 앞으로 귀로 살아야지….’ 하고 용기를 냈던 그의 작은 바람마저 3년 전 난청 판정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에게 난청이 온 건 기능반 아이들을 지도하며, 컷팅기계의 소음에 장시간 노출됐기 때문이다. 눈을 대신해 귀로 상황을 읽어야 했기에 엄청난 굉음 속에서도 보호용 귀마개를 착용하지 않은 게 결국 난청을 초래한 것. 이렇게 하루하루가 시련의 연속이지만, 정작 구 교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날이 없다. 

그가 새벽부터 밤늦도록 아이들을 지도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것도 같은 교직에 있는 아내의 믿음과 든든한 지원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김혜경 당곡고 수학교사가 바로 ‘구두닦이 선생님’으로 불리던 초임교사 시절에 만난 그의 아내다.    

“시험기간이 되면 정말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몇 명을 불러 모아 아내가 수학지도를 해 줍니다. 방과 후에 아내가 학교로 찾아오거나 노는 토요일을 이용해 기능반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죠. 기초가 부족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많지만 그렇게 아내에게 배운 학생이 전교 수학 1등을 했을 때의 보람이란….”   

부부가 방과 후에 다시 만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열정을 외면하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명절기간에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는 문을 연 식당이 없어 그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직접 밥까지 차려줬을 정도다. 

매일 아침 그를 출근시키고 학교로 향하는 아내와 퇴근길을 책임져 주는 동료 교사들까지…. 그와 함께 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이젠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교감을 나누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됐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믿음만큼 용기를 얻었고, 자신을 향한 미소에 지금까지 웃으며 교단에 설 수 있었음을 말이다. 앞으로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어렵겠지만, 그는 오늘도 교실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가슴으로 힘껏 안는다.   

 교과부 웹진  꿈나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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