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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진명, 무서운 독서로의 권유

대한민국 교육부 2009. 12. 9. 11:31
12월, 무서운 독서로의 권유
김진명 소설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저자


내가 첫 작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써야 하겠다고 결심했을 당시 나는 작가 지망생도 아니었고 습작을 해본 일도 없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일단 펜을 들자 나는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나갔고 글을 쓰는 동안 차츰 훈련이 되어 모두 세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마지막 셋째 권은 불과 일 주일 만에 다 써버렸다.

요즘도 나는 두 권짜리 장편 소설을 두 달 채 안 걸려 쓰는 편이고 소설의 주제나 소재를 선택할 때도 고민하는 법이 없다.

그냥 노트북 앞에 앉아 평소 머릿속에 있던 생각 한 줄기를 풀어내 키를 누르기 시작하면 바로 소설이 된다. 이 얘기를 하면 가끔 질문을 받곤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을 묻다  

곰곰 기억을 더듬던 나는 대학 입학시험을 마치던 해의 겨울을 떠올리게 되었다. 시험을 마친 후 밀려드는 해방감에 술도 마시고 여행도 하고 빈둥거리기도 하던 나는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하나 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을 한 번 읽어보자는 다소 따분하지만 재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한 목표를 세우고 선생님들에게 뭐가 가장 어려운 책인지 물어보았다. 

선생님들은 평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지 손쉽게 어려운 책을 추천하지는 못하셨고 자연히 나는 스스로 도서관을 찾아 이런 저런 책들을 떠들어보게 되었다.



그 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는데 나는 당시로서는 철학, 그 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가장 어려운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대학에 들어가 철학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게 된 나는 가장 어려운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트락타투스 로기코 필로조피쿠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지금은 브라이언 그린이라는 과학자의 '끈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생각하지만, 하여튼 그 때 나는 『순수이성비판』을 물고 늘어졌다.

책이 워낙 어려운데다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사람의 주관적 이론이라 아무리 집중해도 나는 그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결국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스스로 명석하다고 자부하던 내가 한글로 된 책을 집중해서 읽으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나에게 괴로움과 더불어 반성과 분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내가 상당히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그야말로 어린 아이 수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해 겨울부터 나는 무서운 독서에 빠져들었다.  



나는 일단 장시간 책을 보는 습관을 키우기 위해 재미있는 책들을 양으로 읽어내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건 무척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독서 지도는 책을 좋은 책, 나쁜 책으로 나누어 좋은 책을 읽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악서와 양서를 구분하는 기준도 어렵거니와 나는 악서도 양서 못지않게 나에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나는 만화, 문학, 사회과학, 철학, 종교, 자연과학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가장 어려운 책 한 권을 읽어보자던 나의 목표는 인간이 쓴 책이라면 모두 한 번 읽어보자는 목표로 바뀌게 되었다.



나의 이런 독서 탐험은 일단 대학 2학년 말이 되어서야 끝이 났는데 그때까지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미팅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도서관 문이 열리는 시간부터 닫히는 시간까지 늘 학교 도서관이나 남산도서관에서 살았다.

독서는 자연히 사색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 나는 많은 시간 세상의 여러 분야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나의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정보는 뇌 속의 데이터베이스와 의식에 결합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소매치기의 안창따기 수법에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까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행동과 생각이라면 무엇에든 낯설지 않고 어떤 종류의 소설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삶에는 여러 길이 있고 어떤 길도 다 의미있다  


독서에는 무엇보다도 시기가 중요한데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왜냐하면 독서는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뇌 속에서 다른 기억 및 정보와 결합해 의식을 개발하고 창의력의 기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릴 때의 풍부한 독서만이 문리를 트이게 하는데 이 문리가 트여야만 비로소 형이상학적 복합사고가 가능하고 진리규명이라는 인간의 최고 목표를 실현할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길이 있고 어떤 길에도 다 의미가 있다. 배운 자가 못 가진 자보다 낫지 않고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보다 못하지 않은 게 인생이다. 사실 나는 고3 때 대학 갈 생각을 접고 아버지에게 미국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 요금과 보름간 뉴욕에서 지낼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평생 배워야할 것은 고등학교에서 다 배웠다고 생각했고 빨리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으로 가 혼자 성공을 일구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아버지에게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아버지, 지금 저의 머리는 최고로 명석하고 불구덩이라도 서슴지 않고 뛰어들 용기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뉴욕으로 가면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 반드시 커다란 성공을 일구어 낼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이란 곳은 이 거칠고 뜨거운 열정을 오히려 잠재우는 곳입니다. 나는 먼저 성공하고 나서 나중에 그 성공의 힘으로 대학 졸업장은 물론 박사학위까지도 이 사회로부터 받아낼 것입니다."
 

아마 그 때 내가 미국으로 갔으면 큰 돈을 벌었을 것이고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이 생각이 한편 대견하다. ‘현대'를 일으킨 정주영 회장이 그랬고 일본의 ‘마쓰시타' 회장이 그랬으며 젊은이의 도전방식으로 아주 훌륭하다. 

하지만 이 당당한 도전에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독서와 사색을 할 시기를 놓치고 만다는 사실이고 이것 이상 큰 불행은 없다. 세상을 굳이 두 부류로 나눈다면 독서를 한 사람과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12월, 바쁜 세상과 담을 쌓고 무서운 독서에 빠져들어 보는 게 어떨까? 
 교과부 웹진  꿈나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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