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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방법

대한민국 교육부 2010. 10. 26. 13:48

반갑습니다, 아이디어 팩토리 3기 기자단원 이하림입니다.
 
저는 올해 1월 말부터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에서 녹음도서 제작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답니다. 조금이나마 다른 분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활동을 찾아 새해 초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제가 살고 있는 서대문구와 마포구에서 운영하는 봉사센터 홈페이지를 누볐는데, 마침맞게 제가 비교적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에 자리가 빈 봉사활동이 있어 들뜬 마음으로 녹음봉사에 지원했지요.
 
하지만 워낙 현재 일하고 계시는 봉사자 분들의 면면이 출중하신 터라, 시험녹음을 통해 제가 그분들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하더라고요. 그날따라 유난히 목 푸는 데에 시간이 걸려 조바심이 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시험녹음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렸는데, '목소리가 좋다'며 저의 합격을 알려주시던 주무관 님의 전화가 어찌나 반갑던지요. 제가 소소한 방송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낭독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닌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는 각 봉사자 분들이 담당하는 도서와 테이프 보관함이 수납된 책장 앞입니다. 제가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에 와 가장 먼저 찾는 곳이죠. 여기서 제가 맡은 도서와 제가 녹음하고 있는 테이프를 꺼내 녹음실로 향합니다.
 

1단 좌측 사진 : 봉사자들의 목소리로 다시 빚어질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저도 정식봉사자가 된 뒤 처음 녹음할 책을 고를 때 이 책꽂이에서 '끌리는' 책을 뽑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사임 주무관 님 (마포평생학습관 자료봉사과 시각장애인실) 의 말씀으로는 일단 시각장애인 분들께서 읽고 싶어하시는 도서를 우선적으로 작업하고, 이차적으로는 마포평생학습관 자체에서 운영하는 선정위원회를 통해 신간 위주로 책을 들여와 활동 대상 도서로 삼는다고 합니다.
 
2단 좌측 사진 : 60분용 테이프, 90분용 테이프, 멘트가 삽입된 테이프가 담긴 테이프 보관함입니다.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에서 제작된 도서임을 알리는 공식 멘트가 첫머리에 녹음된 테이프는 한 도서를 처음으로 녹음할 때 쓰고요, 이후에는 90분용 테이프를 쭉 사용하다가 책의 끝머리에 가서는 분량이 적어지는 것을 감안하여 60분용 테이프를 씁니다.
 
우측 사진 : 봉사자 분들께서 녹음을 하시는 공간입니다. 녹음실 전용 공간은 두 군데고요, 때에 따라서는 대면봉사실을 녹음실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최대 세 곳을 녹음실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1단 좌측 사진 : 녹음 봉사자 분들의 시간표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 녹음실이 (최대) 세 곳이라 시간대마다 세 분을 정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금요일 3시에서 5시까지를 자원봉사 시간으로 정했는데요, 이때가 하루의 마지막 시간대라 뒷 시간대에 대기하는 자원봉사자 분이 없어 주무관 님들께서 퇴근하시기 전인 6시까지는 다소 시간 활용이 유동적인 편입니다.
 
1단 우측 사진 : 각 녹음실의 서랍마다 비치되어 있는 '녹음도서 낭독순서', 즉 녹음봉사자를 위한 매뉴얼입니다. 3.의 1)과 2)에서 보실 수 있듯 테이프의 한 면이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이에 대해 안내 멘트를 넣는데요, 끝부분의 경우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안내 멘트를 넣는 것이 쉽지 않답니다. 레코더 창이 불투명해서 테이프의 남은 양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어려운 터라, 가끔은 녹음 과정에서 본문을 쭉 낭독하다가 테이프가 불시에 멈추기도 하거든요. 이때는 약간 그 뒤에 음성적 공백이 생기더라도 본문 중 일부를 테이프의 다음 면으로 넘기고 안내 멘트를 먼저 녹음합니다.
 
2단 사진 : 봉사를 하러 올 때마다 시작 시간과 종료 시간을 기록하는 일지입니다. 이날은 저를 포함하여 전부 여성 자원봉사자들만 오셨네요. 주무관 님의 설명에 따르면 1997년에 서울특별시의 유일한 시립 시각장애인실인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이 만들어지면서 봉사활동 또한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체 여성 봉사자와 남성 봉사자의 비율은 대략 1:8 정도 된다고 합니다. (8월 31일 기준, 남성 53명, 여성 392명) 그 중 올해에 자주 활동하시는 분들을 분야별로 나누면 녹음 분야 37명, 도서입력 분야 15명, 대필 분야 12명, 대면 분야 3명 순입니다. 봉사자 분들께서는 하루에 여섯 분에서 일곱 분 정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올해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198권이 녹음도서로 새로 태어났고, 118권이 전자도서로 탈바꿈했습니다. (2010년 8월 기준)

 
녹음실 안의 풍경입니다. 독서대, 레코더, 헤드폰, 마이크 등이 보이지요. 지금 제가 녹음하고 있는 도서는 이현수 선생님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장미나무 식기장>입니다. 혹 제 미욱한 실력이 이야기가 지닌 감동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걱정할 때도 있지만, 새 테이프의 빈 라벨에 책 이름과 테이프의 숫자를 적어넣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 경우에는, 현재 녹음하고 있는 도서가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보니 인물의 감정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파악해서 그에 맞게 낭독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하더군요. 한번 할 때마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 장기간에 걸쳐 녹음하는 것이라, 소설 한 편이 끝날 때까지 처음에 정해두었던 각 인물의 목소리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도 관건입니다. 각 인물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원래 목소리와 달리 꾸며 내는 것이다 보니, 레코딩 결과물을 체크해 보면 지난 주의 목소리와 이번 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나기는 하더라고요. 훗날 이 테이프를 들으실 시각장애인 분들께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 또한 아마추어의 매력이라 좋게 여겨주시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때가 되면, 일단 전반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감정선을 알기 위해 대략적으로 이야기의 끝까지 훑으면서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식으로 낭독의 기틀을 잡습니다. 그리고 녹음 직전에는  장면 단위로 더 세세하게 내용을 파악하면서 발음이 어려운 부분 등을 체크하고 입을 풀어주지요. 좀 더 간결하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교양 서적 종류라면 한 자 한 자 흐트러지지 않도록 더 느릿느릿하고 면밀하게 읽어야 하겠지만, 제가 맡은 도서가 소설이다 보니 아무래도 청자의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속도감 있게 물 흐르듯 낭독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더군요. 주무관 님도 같은 내용의 당부를 하셨고, 실제 레코딩 결과도 그 생각에 맞게 나오고요.
 

그럼, 실제 녹음된 파일을 잠시 들어보시겠어요? 이현수 선생님의 소설 모음집인 <장미나무 식기장>에서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되는 것들의 목록'을 제가 녹음한 것 중 일부입니다. 
  
 
<장미나무 식기장> 제4테이프 후면은 188페이지에서 시작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테이프를 갈 때' 첫머리에 들어가는 멘트입니다. )

... 잘못하다간 결혼 생활 내내 불우이웃을 도와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한 달이 멀다 하고 목돈 드는 자선 바자에 숱 적은 눈썹을 휘날리며 부리나케 뛰어다녀야 할 지도 모른다. 주스잔의 테두리를 검지로 훑던 정호 누나가 매듭짓듯 말한다.

"처음이 힘들지, 살다 보면 그럭저럭 적응될 거예요."
 
저 말처럼 무서운 게 어디 있나? 인간의 적응력이 얼마나 뛰어난데. 노예나 검투사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한 사형수도 다들 처음에만 힘이 들지. 점점 뒷골이 땅긴다.
 
"선배만 그런 게 아니고 나도 그렇다고. 서른 하나, 꽃피는 인생인데 김 빠진 사이다처럼 요렇게 맹맹한 채로 선배랑 살아야겠어?"
 
곰곰 생각해 보니, 유정호의 요 말도 수상하다. 노예나 검투사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할 사형수 형편이면, 당연히 결혼은 못하는 거지!
  
은영은 키위 주스가 반이나 남았는데도 토마토 주스를 한 잔 더 주문한다. 정호 누나가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은영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 유정호나 정호 누나나, 유씨들이 단체로 무섭다. 설마, 잠깐 조는 틈에 꾸는 어지러운 낮꿈은 아닐 테지.
 
제 발연기(!)가 담긴 녹음 파일의 일부를 방문자 분들께 들려드리고 나니 조금 쑥스럽네요.
  
방금 들으신 부분은 은영이 정호의 누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생각을 하는 장면입니다. 지금은 은영이 정호의 구체적인 가족사와 직면하기 전 정호의 가족사에 대해 여러 추측을 하면서 맛을 보는 단계라, 은영의 생각과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낭독에 높낮이를 주어 은영의 상상에 숨을 불어넣으려 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은영의 모습을 담을 때에는 목소리가 점차 건조한 쪽으로 바뀌고, 말투의 빠르기 또한 조금 더 느려지겠지요.
 
일상에 다소 지쳐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정호의 누나는 정호의 애인인 은영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그리 반기지 않는 분위기가 장면 전반에 깔려있어, 그녀가 은영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에 힘을 빼고 약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느낌을 살리려 했습니다. 한편, 정호는 이야기 초반에 은영에게 능글맞은 모습을 많이 보이는 캐릭터라서 은영이 정호의 말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그런 느낌을 주려 했고요.
 
비록 서툴긴 해도, 저의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시각장애인 분들께서 이야기에 몰입하시는 데에 크게 거슬리는 부분 없이 잘 녹아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거쳐 한 권의 책을 온전히 녹음하면,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테이프들을 모아 상자에 넣고 일련번호를 붙여 책장에 꽂습니다. 테이프들이 하나의 녹음도서로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시각장애인실 내에서 보관하는 '원본'에 해당하고요, 실제 시각장애인들에게 우편 등으로 대출되는 녹음도서는 이 '원본'을 복사한 '복사본'입니다. 혹 '복사본'이 손상되었을 때는,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원본'을 활용하여 새로이 '복사본'을 만든다고 하는군요.
 
이렇게 봉사자 분들의 녹음과 입력으로 만들어진 녹음도서와 전자도서 목록은 시각장애인 분들 전용 커뮤니티 (현재 회원 수 11,932명) 인 '넓은마을' (http://web.kbuwel.or.kr/menu/login.php?cmd=first) 에 업로딩되어 시각장애인 분들의 대출 신청을 기다리게 됩니다.
 
 

취재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실의 정사임 주무관 님과 자원봉사자 이민정 님 (입력 분야) 이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은 이 일을 하면서 그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솟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실 안에 비치된 점자도서에 눈길이 오래 머물고, 거리 곳곳의 점자유도블록에 군데군데 모자란 부분이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는 에피소드가 그 뒤를 이었지요.
 
저 또한 '문 밖으로 나오는 데에 1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非) 시각장애인들 중심의 세상에서 생활하는 일이 녹록치 않은 시각장애인 분들께 미흡하게나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깨가 저절로 무거워지고 마이크 앞에서 제 목소리에 조금 더 책임감을 담기 위해 애쓰게 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제가 좋아하고 또 조금이나마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분들께 '잘 쓰일 수 있음'을, '작은 배려가 될 수 있음'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임하는 일은 제 자신에게도 큰 배움이 되고 있습니다. 가끔 시각장애인실을 어렵게 찾아 주신 시각장애인 분들께서 예상보다 더 방대한 자료와 섬세한 서비스에 감탄하시고서는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 또한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녹음 테이프를 통해 저와 함께 책 속 이야기를 나눌 시각장애인 분을 향한 설렘과 녹음실 안에 나지막히 제 목소리로 이야기가 울려 퍼질 때 그 이야기에 온전히 취할 수 있는 환희에 감사하며, 마포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또 빚어지는 중입니다.


크리스탈
 | IDEA팩토리 이하림 기자 | 연세대 국어국문 | shymoonlight@hanmail.net

제 자신의 모자람을 끝없는 배움으로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귀를 기울이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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