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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하로 서원에서 옛 향기를 느끼다! 본문

~2016년 교육부 이야기/부모의 지혜 나눔

김천 하로 서원에서 옛 향기를 느끼다!

대한민국 교육부 2014. 10. 17. 11:00

김천 하로 서원에서 옛 향기를 느끼다!

김천 I 하로서원 I 교육기관 I 강학공간 | 재향공간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가 모인다는 성균관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에 지방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과거 선비의 삶과 정신이 깃든 학문과 지성의 공간이었던 서원을 찾았습니다.


서원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인데요,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이 유명하지요.


서원은 조선 초부터 계속되어온 사림의 향촌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최초의 서원은 경상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순흥의 백운동에 안향의 옛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서적을 구매하여 유생들을 가르쳤던 백운동 서원이라고 합니다. 그 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서원의 현판과 토지를 내려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는데 당시 국왕인 명종은 1550년(명종 5년)에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현판과 서적, 토지 및 노비를 내려 주어 이 토지와 노비에 대해서는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합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숙종 때는 1개 도의 서원이 80~90개소에 이르기도 하지만, 서원이 후학양성과 제향의 기능을 벗어나 정치세력의 기반으로 폐단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1864년(고종 1년)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으며, 사액서원 중에서도 모범이 될만한 47개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고 합니다.


찾아간 곳은 김천의 하로 서원인데요. 하로 서원은 하로 마을에 있고, 하로 마을에는 사모 바위라는 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다고 하여 궁금했습니다. 남아 있는 서원 중의 하나인 김천의 하로 서원은 김천시 양천동에 도로변에서 1km떨어져 있어 조금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가을이지만 내리쬐는 햇살에 조금은 더웠습니다.

하로 서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비석 4기가 서 있는데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빈한 관리로 꼽았던 노촌 이약동 선생의 신도비와 이약동의 아버지 이덕손 유지비, 산천단 유적비, 벽진이씨세거지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산천단 유적비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돌로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하로 서원의 안내문을 볼 수 있는데 그 옆에 사모 바위 전설을 적어놓은 커다란 비(碑)를 볼 수 있답니다. 그 바로 앞에는 두 개의 큰 돌이 몸에 금줄을 감고 있는데요, 사모 바위와 할미바위라고 하는데요, 커다란 돌에는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개의 돌 모양을 잘 보면 한쪽의 돌은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던 검은 모자(사모(紗帽)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사모(紗帽) 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그냥 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사모의 모습을 갖고 있네요.

사모 바위 전설에 따르면 원래 이 바위는 황악산 끝자락인 모암산 절벽에서 하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관리들이 사용하는 사모 형상 바위의 정기를 받은 하로 마을에서 고관들이 대거 배출되고 이들이 고향을 자주 내왕하니 수발을 책임져야만 했던 역리들이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사모 바위를 깨뜨렸다고 합니다.


바위가 떨어진 후 하로 마을이 침체하게 되자 마을에서 사모 바위를 하로 마을 입구로 옮기고 정성으로 보호하며 옛 명성을 되찾고자 대대로 기원을 올려 왔다고 합니다. 마주하고 있는 또 하나의 큰 돌은 할미바위라고 하는데요, 예로부터 김천은 풍수적으로 볼 때 혼인형으로 불렸는데 모암산의 사모 바위가 남성, 즉 신랑이며 마주하고 있는 할미바위는 여성, 즉 신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냥 보았을 때는 단지 돌이었는데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들으니 새롭게 보입니다. 처음 사모 바위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누군가를 많이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모가 다른 의미의 사모였네요.

사모 바위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저만치서 하로 서원이 보입니다.

서원에 도착해 하로 서원의 안내문을 천천히 읽어봅니다.

하로 서원은 1648년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시대 관료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입니다. 평정공 이약동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상정일에 유림 향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약동은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노촌(老村)입니다. 문종 1년(1451)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후 청도군수, 구성 부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성종 1년(1470) 8월에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 받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재임 중에 착용하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들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 말을 타고 가다가 보니 손에 든 말채찍이 관아의 물건인 것을 알고 되돌아와서 말채찍을 성문 누각에 걸어놓고 한양으로 갔다고 합니다. 후임자들이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겨 말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놓아 두고 본보기로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말채찍이 썩어 없어지게 되자 제주백성들이 바위에 그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기념하였는데 그 바위를 괘편암(掛鞭岩)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의 청백리 한 삶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로 서원은 강학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강학공간강당, 동재, 서재 3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당은 노수당, 동재는 염수당, 서재는 필유당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현판 이름은 문중에서 합의해 결정했다고 합니다.

재향 공간사당, 외문, 내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당은 청백사, 내문은 숙경문, 외문은 영사문이라 이르고, 강학공간에서 사당으로 연결되는 문의 이름은 여재문이라 이른다고 합니다.

영사문은 하로 서원을 찾으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답니다. 청백사의 외삼문이지요.

여재문을 통해 강학공간에서 사당으로 갈 수 있답니다. 한쪽엔 평정공 노촌 이약동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유허비는 다른 서원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하로 서원 강당으로 안쪽으로 노촌당, 바깥쪽에 경재당 편액이 있습니다.

유생들이 거처했을 동재건물인 염수당과 서재건물인 필유당의 모습 뒤로 하로 서원 강당 바깥쪽에 경재당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글자체가 전서체라고 하는데요.

전서체는 정부수립 후 63년 동안 공문서 관인(官印)으로 사용되던 것이 2011년을 기해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서체(篆書體)는 글자의 획을 마음대로 늘이거나 꼬불꼬불하게 쓰다 보니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바꾸게 되었다고 하는데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글자의 형태는 예쁘다는 생각이 드네요.


서원에 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듭니다. 요즘은 서원을 답사하기에 아주 좋은 계절인 것 같아요. 서원을 둘러보다가 서원 앞마당에 서니 그제야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옵니다. 옛사람들은 서원을 산과 물이 있는 곳에 지으려고 했다는데 하로 서원도 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으로 흐르는 감천 물이 흐르고 있답니다. 서원의 모습 그대로가 자연을 담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원을 돌아 나오면서 평생을 청렴하고 결백하게 살아온 이약동이 자손들에게 유훈으로 남겼다는 시를 생각하며 그의 청백리 정신을 되새겨 봅니다.

 

가빈무물득지분(家貧無物得之分) 집안이 가난하여 얻을 것이 전혀 없고

유유단표로와분(惟有簞瓢老瓦盆) 오직 표주박과 낡은 질그릇만이 있네

금옥만영수수산(金玉滿籯隨手散) 금과 옥이 광주리에 가득하여도 손 따라 흩어지니

불여청백부아손(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을 자손에게 남기는 것만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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