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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발해주까지 지배한 나라, 발해!

대한민국 교육부 2015. 6. 30. 14:46


러시아 연해주까지 

지배한 나라, 발해! 



■ 발해의 시작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계속 되었습니다. 밖으로는 당나라가 고구려의 땅을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지만, 고구려의 유민들이 계속 저항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의 장수와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도 강제로 이주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대조영은 오랜 전쟁 등으로 당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이를 틈타 당나라를 물리치고 현재 중국의 길림성 동모산에 새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그 나라가 ‘발해’입니다.

 

처음 발해의 영토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발해는 영토를 넓히려 애썼고, 그 결과 고구려의 옛 땅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과 현재 러시아의 영토인 연해주까지도 지배하게 됩니다. 


▲발해의 영토(출처: 에듀넷)



■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왕국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닙니다. 중국의 옛 책에서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고, 발해의 백성 중 많은 수가 말갈족과 같은 다른 민족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주장이 나오고, 발해의 유물과 유적이 연구되면서 발해는 우리나라의 역사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는 연표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남북국(위에는 발해, 아래는 신라)으로 많이 만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중심으로 말갈족 등 다른 민족을 통합하여 세운 나라였으나, 고구려의 땅에서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나라로, 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했으며, 발해의 왕족이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발해가 우리나라의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발해가 다른 나라에 보낸 문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일본이나 신라에 문서를 보낼 때 나라 이름을 ‘고려(고구려)’라 하였습니다. 또한 발해의 유물과 유적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예로 정혜공주의 묘는 돌로 방을 만들어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돌로 된 벽돌을 한 층 한 층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모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무덤 양식과 매우 비슷합니다.


▲정혜공주의 묘(출처: 에듀넷)


또 다른 예로 온돌이 있습니다. 온돌은 땅을 파 그 속에 숯 등을 넣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이나 흙으로 덮어 바닥을 따뜻하게 하여 생활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난방법으로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발해 유적지에서 이러한 온돌이 많이 발견 되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들입니다. 



■ 발해의 우수한 문화

발해는 매우 뛰어난 문화 수준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수도인 상경은 발해 문화의 우수성을 매우 잘 보여주는 예인데, 현재는 터 밖에 남아있지 않으나 터에 남은 흔적으로 예상하는 상경의 규모는 매우 거대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왕족이 사는 궁 앞에 넓고 긴 도로를 만들고, 도로를 중심으로 나라의 일을 하는 관청, 절, 백성이 사는 집들을 배치하였으며 그러한 건물들을 둘러싼 외성의 길이가 17km에 달했다고 합니다. 


▲발해 상경 용천부 평면도(출처: 에듀넷)


또 건물의 지붕 위를 장식하는 치미는 그 크기로 건물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상경 터에서 발견된 큰 치미로 볼 때, 웅장했던 상경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치미나 기둥의 장식 등에는 유약을 발랐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가격이 비싼 유약을 바른 장식으로 건물을 꾸민 것으로 보아 이는 발해의 경제력과 문화수준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발해가 크게 발달하면서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게 되자 당나라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발해 치미(출처: 에듀넷)


발해는 거대한 영토와 높은 문화적 수준을 지니면서 발해만의 연호를 쓰는 자주적인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연호는 해에 붙이는 이름으로 인물의 탄생이나 나라의 왕이 왕위에 오른 해에 이름을 붙여 시간을 나타내는 것인데 발해는 나라가 세워진 초기부터 발해만의 연호를 정하여 당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나라임을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음과 비교하였을 때 발해가 얼마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발달시키고자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 연호를 사용하는 의미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연호인 서기는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합니다. 2014년은 예수가 태어난 지 2014년이 된 해입니다. 서기 의 사용은 예수의 탄생이 시간을 정하는데 있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나라는 예수의 탄생보다 우리나라의 시작인 고조선이 세워진 해를 기준으로 단기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르면 2014년은 단기 4347년입니다. 단기의 사용은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시간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나라 고유의 시간을 사용하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연호는 그 나라만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우리 민족이 처음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중국의 연호를 따라 썼는데 광개토대왕은 스스로 연호를 정하여 고구려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강한 나라임을 나타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영락 17년은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른 지 17번째 해임을 나타냅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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