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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원자폭탄을 만들었는가

대한민국 교육부 2011. 1. 3. 11:33
원자폭탄에 대한 신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이휘소. 두 과학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물리학자면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말 원자폭탄 개발에 깊이 관여했을까? 아니면 원자폭탄 개발은 그저 소문에 불과할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E=mc2이라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해진 물리학 공식에 대한 대중적인 열광은 이 믿음을 굳건히 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실상 아주 약간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에너지-질량 등가 공식으로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기본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지만, 그 중요성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미하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아인슈타인이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 물리학자의 서신을 자신의 이름으로 루즈벨트에게 전해주어 맨해튼 프로젝트의 물꼬를 텄을 뿐, 실질적인 연구작업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인슈타인은 1955년 버트란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원자폭탄에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을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 인물로 묘사한 타임지 1946년 7월호의 표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최초의 공식보고서인 Smyth Report. 이 보고서는 사람들에게 이론물리학이 원자폭탄 제조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이휘소가 핵개발을 도왔다?
 

이휘소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었다고 평가받는 한국 출신의 이론 입자 물리학자로,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입자 물리학자로서보다는 한국의 핵개발을 도왔던 인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휘소의 핵개발 연루설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그는 핵개발에 필요한 핵심정보를 미국 정부 몰래 한국에 넘겨주었다고 한다. 핵심 계산이 담긴 조그만 투명용지를 다리 살 속에 숨겨 들여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1977년 교통사고로 인한 이휘소의 때이른 죽음 뒤에 이휘소의 이런 행동을 간과할 수 없었던 미국정보국이 있었다는 음모론이 양념으로 추가된다.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90년대 초에 나온 몇 편의 소설을 통해 유명해졌고 2004년에는 유명한 시인이 소재로 삼기도 했다.

‘원자폭탄을 개발하려 한 민족주의자’라는 잘못된 인식 덕분에 이론물리학자로서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오히려 가려졌다.


2006년에 이휘소의 제자였던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강주상씨가 이휘소 평전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론 입자 물리학자로서 이휘소의 진면목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세간에 퍼진 핵개발 연루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문인지, 이론 입자 물리학과 원자폭탄 제조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지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강주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달 전 한 방송사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휘소가 누구인지 안다고 한 응답자 중에 70%가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가 한국 핵개발을 도왔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소문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일까?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원자폭탄의 핵심 정보를 빼돌리는 애국적인 과학자의 이야기는 첩보영화 소재로 딱 맞아 보인다. 이처럼 그 이야기가 선사하는 재미와 감동이 이 이야기의 생명력을 연장시켜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재미 때문일까, 다른 시대,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한 비슷한 얘기들을 종종 접하곤 한다.

1952년 미국 네바다주 유카평원에서 실시한 원자폭탄 실험과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돔. 깊은 아픔과 상처에도 원자폭탄 개발은 계속 이루어졌다.




 원자폭탄과 이론물리학자
 

1943년 3월의 어느 늦은 밤에 캘리포니아 버클리 방사연구소의 한 과학자가 그 지역의 공산당 당원이었던 스티브 넬슨이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넬슨에게 복잡한 공식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자 넬슨은 빠르게 그 공식을 베껴 적었다. 일이 끝나자 과학자는 공식이 적힌 종이를 챙겨 그 집을 떠났다. 내일 아침이 되기 전까지 그 종이를 연구소의 원래 그 자리에, 아무도 모르게 돌려놓아야만 했다.

1948년 9월, 미국 반미활동 조사위원회(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가 발표한 보고서에는 넬슨의 집을 방문한 “과학자 X”의 첩보 행위가 담겨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 X”는 원자폭탄에 관한 정보를 소련에 넘긴 혐의를 받았다. 그가 넘긴 정보는 종이에 적힌 ‘복잡한 공식’이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원자폭탄 성공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치 못했던 빠른 성공. 과학자들이 넘긴 정보가 소련의 원폭 개발을 앞당겼단 말인가.

원폭 개발의 비밀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공식, 과학자의 첩보 작전, 어딘가 이휘소의 이야기를 닮지 않았는가? 미국 과학사학자 데이비드 카이저(David Kaiser)에 따르면 원폭의 비밀 공식을 훔친 과학자에 대한 이런 식의 전형적인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의 시작과 함께 형성되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과학자들이 훔치는 것은 원폭 제작의 핵심 역할을 하는 ‘비밀공식‘이었다.

사실 전쟁 직후에는 애초에 비밀 공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47년 뉴욕 타임즈에 난 글은 이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원자폭탄의 ‘비밀’은 옥수수빵 요리법처럼 한 두 페이지로 적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수십 톤의 청사진으로나 그것을 옮겨갈 수 있을까, 신발 뒷창에 숨겨서 국외로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1년만에 상황이 반전됐다. 반미활동 조사위원회가 소련에 원자폭탄 제조방법을 넘긴 스파이로 과학자를 지목하면서 이제 원자폭탄의 비밀은 몇 개의 공식이면 온전히 담고도 남을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다.

매카시즘 광풍을 풍자한 워싱턴포스트 1950년 3월 29일자 만평


흥미롭게도 반공 이데올로기와 원자폭탄의 비밀공식이 묘하게 결합되어 비밀공식의 수호자들인 이론물리학자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유독 취약하다는 생각이 세간에 퍼지게 되었다. 너무나 중요한 공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공산주의에 빠져든다는 믿음이다. 실제로 1949년부터 몇 년 동안 뉴욕타임즈 매거진의 지면을 통해서 과학 저널리스트와 심리학자들은 이론가들을 마르크스주의로 경도하는 특정한 “과학적 정신”이 존재하는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50년 이론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의 스파이 사건은 원자폭탄의 비밀공식과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공산주의, 이 세 항을 연결하는 고리를 아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후 매카시즘의 광풍이 진정되고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한 쌍을 이루던 원자폭탄-이론물리학자-공산주의 중에서 공산주의는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원자폭탄과 이론 물리학자의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휘소의 소문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민족주의가 채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 그 덕분에 이휘소는 유명해지고 존경받지 않는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그를 널리 알렸을지는 몰라도, 그의 진면목을 알리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원자폭탄 연구를 했다고 믿고 싶어 하지, 그가 입자 이론물리학에서 했던 기여를 알고 싶어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글 | 박민아(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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