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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근친결혼? 본문
합스부르크가의 몰락을 가져온 것은 근친결혼?
“유전질환이 유럽 최고 가문의 종말을 초래” 英 인디펜던트
합스부르크 가문(The House of Hapsburg)을 둘러싸고 유명한 라틴어 시구(詩句)가 있다. “Bella gerant alli, tu felix Austria nube”라는 말이다.
영어로는 “Let others wage wars, but you, happy Austria, shall marry”로 보통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하게 만들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을 하라.”라는 말이다.
이는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전쟁이 아닌 결혼정책으로 외교에 성공했다는 말을 의미한다. 짓궂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전쟁 같은 힘들고 피 흘리는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결혼으로 당신들이 정복한 영토를 접수하고, 승리의 영광도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600년에 걸쳐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유럽 최대가문의
합스부르크 왕조. 그러나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으로
대가 끊겨 멸망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실 이러한 결혼정책은 대단히 성공했다. 무려 600년이나 그 힘을 발휘했다. 신성로마황제 직위를 싹쓸이 했는가 하면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며 자주 마찰을 빚었던 프랑스의 프랑코 왕국을 제외하고 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다시 말해서 전 지역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들이 계속 나왔다. 그들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기에 앞서 위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가문에 순종하여 충성할 수밖에 없다.
면밀히 이야기하자면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결혼정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이 나오지 않은 세력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왕을 배출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전역을 가문의 지배하에 두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가문의 딸들을 프랑스의 왕들과 결혼시켰다. 프랑스 프랑수아 1세의 왕비 엘레오노레를 비롯해 6명이 합스부르크 출신이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사치와 허영의 극치를 대표하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합스부르크 출신이다. 그에 대한 편견도 사실은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녀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남편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심지어 그녀의 대를 이을 둘째 아들 루이 17세조차 굶어 죽는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를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혁명의 불길은 어떻게 끌 수가 없었다.
허영과 사치의 상징이자 프랑스 대혁명의 비극의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다.
그래서 프랑스 국민들로 부터 미움을 더욱 많이 샀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두 번이나 왕궁을 떠나야 했다. 그러면서 결코 나폴레옹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폴레옹을 미워했다.
1821년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음을 앞둔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이런 유서를 보냈다. “사랑하는 마리 루이즈, 나의 심장을 꼭 보관해 주길 바라오. 나의 진정한 소원이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귀양을 갔을 때 다른 백작과 바람이 나 아들까지 낳은 루이즈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나의 소원은 당신의 심장이 당신과 함께 당신 무덤에 묻히는 것이오.”
이에 앞서 루이 14세 왕비로서 ‘추녀’로, 그리고 ‘주걱턱’으로 소문난 마리아 테레사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한심할 정도로 멍청했다고 전해진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멀리 떨어진 강력한 스페인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근친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혼인으로 혈통은 계속 꼬여만 갔다. 유전자는 더욱 병들어만 갔다.
마리아 테레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모의 아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그녀는 주걱턱 왕비로도 불렸다. 주걱턱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물림을 통한 유전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어쨌든 얽히고 설키는 결혼정책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6세기 동안이나 유럽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근친결혼 정책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유전인자가 병들어 가면서 유전질환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알바레스 교수 “근친혼에 따른 유전질환으로 代 끊겨”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을 근친혼 탓이라고 밝혀낸 학자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대학의 곤살로 알바레스(Gonzalo Alvarez) 교수다.
그는 16세기부터 무려 200여 년간 대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이 친척들과 근친결혼을 고집했기 때문에 결국 유전질환으로 혈통이 끊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앙유럽을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알바레스 교수는 1700년 혈통이 끊겨, 결국 브르봉 왕조에 바통을 넘겨준 스페인 왕조에 초점을 맞춰 연구했다.
한 왕조의 힘을 굳건히 지탱하기 위해 정치에서 결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과 제후, 또는 영주나 신하는 결혼을 통해 서로 간의 세력 균형을 꾀할 수 있다. 서로 간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
지방영주는 중앙정부로부터 안전을, 왕이 통제하는 중앙정부는 지방의 반란이나 호족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려를 세운 왕건도 사실 호족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무려 60명이 넘는 부인을 거느렸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결혼정책으로 초창기에 권력을 유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좀 달랐다. 권력 초창기뿐만 아니라 최고로 번창했을 때도 계속 결혼정책을 밀고 나갔다. 합스부르르크 가문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전쟁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유럽’ EU 탄생에 결정적 역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찰스 2세.
유전질환을 앓고 있던 그는 계속 병에 시달렸으며 결국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주걱턱은 이 가문의 대물림이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결국 결혼은 근친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혈통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그러한 가운데서 ‘친족’이라는 구실을 이용해 합스부르크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은 하나’에서 출발해 오늘날 유럽연합 EU가 탄생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유럽을 지배한 고대 로마제국을 든다. 그리고 기독교를 든다. 로마와 기독교가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자면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커다란 영토를 하나의 왕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구나 왕실 간의 결혼으로 소위 ‘이질적인 민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 친척이라는 개념이 깊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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