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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 기운’의 정체 본문
삭막한 도시에서도 자연이 매일 바꾸어 그리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창문 너머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란 흰 도화지가 바로 그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농도와 투명도가 서로 다른 파랑 물감을 풀어놓고, 그 위에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흰구름의 모양을 레고 조각 맞추듯 늘어놓는다.
밤이면 검은 먹물로 물들인 도화지에 점점이 뿌려진 별들과 한 달 주기로 같은 모양을 빚어내는 달이 휘영청 걸린다. 어쩌면 현대 도시의 풍경보다 더 적막했을 조선시대에도 하늘은 마찬가지로 그처럼 수시로 바뀌는 그림을 매일 그려댔다.
태양의 고에너지 입자들이 대기 중의 산소, 질소와 충돌하여 녹색 또는 적색의 빛을 방출하는 것이 오로라이다
일식이나 흑점 등 태양에 이상현상이 나타나면 임금의 덕이 없다거나 혹은 신하가 임금의 총기를 가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 혜성 등 새로운 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의 하늘에 그려지는 그림은 그 자체가 곧 인간사의 길흉화복과 똑같았다. 더구나 공해 한 점 없이 맑았던 조선의 하늘은 지금보다 훨씬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던 무공해 도화지였으니….
그런데 조선의 하늘에 그려지는 그림 가운데는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현상이 있었다. 한자로 적기(赤氣 ; 붉은 기운) 또는 기여화광(氣如火光 ; 불빛 기운)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현상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00여 회나 등장한다.
“밤에 동방·북방·남방에 불빛과 같은 기운이 있었다.” (중종실록 1520년 3월 26일)
“밤 2경에 동·서·남 세 방면에 붉은 기운이 있었는데 불빛과 같았다.” (선조실록 1599년 3월 2일)
“밤 1경에 남서쪽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는데 3경과 4경에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일기 1617년 1월 1일)
한밤중에 한 방면 또는 여러 방면에서 불빛과 같은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니 혹시 큰 산불이 일어났을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다. 실제로 실록의 기록 중에서도 산불로 추정하는 내용이 있다.
1507년(중종 2년) 1월 12일자에 의하면 “밤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고 독서당에서 보고했는데 정말 있었는가”하고 중종이 묻자, “지난 달 그믐날 밤에 서북방에서 불빛과 같은 붉은 기운이 있었고 남방에서는 구름색이 누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들으니 이날 고령·종산 등지에서 우연히 산불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 불빛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승정원에서 답했다.
찬드라 망원경이 관측한 지구 오로라
이에 대해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인군으로서 두려워하는 것은 천변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은 사방에 있는 재이를 가지고 항상 인군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임금의 말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하늘이 보이는 재변을 산불 빛에 돌려버리다니 이것은 상소의 사연을 불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군으로 하여금 이변을 만홀히 여기는 길을 여는 것이니 아첨하는 데 가까운 일이다.”
즉, 그 붉은 기운은 산불로 인한 불빛이 아니라 하늘의 재변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재이사상에 의해 임금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1737년(영조 13년) 11월 3일자의 조선왕조실록에도 하늘에 붉은 기운 등이 나타남에 따라 임금이 이를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데 힘쓰는 것이 좋겠다는 신하의 상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두 기록은 극히 예외적인 사항일 뿐이다. 다른 기록들에서는 이 불빛과 관련해 어떤 일의 조짐이라든가 하는 재이사상의 논평이 전혀 없다. 이 불빛과 관련해 ‘밤 몇 시경 어느 방향에서 붉은 기운이 있었다’라는 간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이 불빛 기록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인조실록이다. 인조실록에는 무려 약 50회나 이 수상한 불빛의 출현이 보이는데, 특히 1624년(인조 2년)에서 1626년(인조 4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인조는 서인 세력과 손을 잡고 무력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추대된 인물이다. 더구나 불빛 기운이 집중되어 나타난 시기는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민심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또 1627년(인조 5년)에는 후금이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해 인조와 조정대신들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난 바 있다.
이처럼 인조 집권 이후 계속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이 연출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밤중 온 하늘을 뒤덮은 불빛 기운에 대해 실록은 어떠한 조짐이나 논평도 달지 않고 있다. 더구나 이 불빛 기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이외에도 BC 35년경인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때의 ‘삼국사기’ 기록을 시작으로 하여 조선 중기 때까지 무려 700여 회나 등장한다.
도대체 이 불빛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구의 하늘이 그려내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오로라였다.
지난 2008년 영국 왕립천문학회가 발간하는 과학전문지 ‘천문과 지구물리’에 ‘불빛 기운은 한국의 오로라였다’라는 제목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 논문에 의하면 1626년 초는 태양 흑점의 극대기였는데, 당시 기록의 시간대와 관측 방향 등을 분석한 결과 1624년에서 1626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연평균 20여 차례씩 등장하는 불빛 기운은 오로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한 이에 앞서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 등은 고려사에 기록된 붉은 기운에 관한 기록들을 분석해 볼 때 당시 한반도에 나타난 오로라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를 1998년에 발표한 바 있다.
오로라란 태양에서 날아오는 고에너지 입자들이 방패처럼 지구 주위를 둘러싼 지구자기장을 따라 극지 쪽으로 흘러가다가 상층 대기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태양의 고에너지 입자들이 대기 중의 산소 또는 질소와 충돌하면 녹색 또는 적색의 빛을 방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밤하늘을 신비로운 빛으로 물들이는 오로라이다.
오로라는 보통 한 줄기 흰 연기가 피어 오르듯이 시작된다. 사진은 알래스카의 오로라 광경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보통 밤 10시에서 다음날 새벽 3시 사이인데, 그 시작은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일 때처럼 하늘에서 한 줄기 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장관이 연출된다. 그 후 부채살 모양의 빛줄기가 펼쳐지며 치솟아 오르는데, 하나가 스러지면 다른 하나가 뒤를 잇는가 하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타오르기도 한다.
하얀 입김처럼 타오르는 오로라는 커튼처럼 옆으로 늘어져 흔들리기도 하며 사이사이 녹색과 붉은색이 출현한다. 조선왕조실록 속에서 가끔 구체적으로 묘사된 ‘불빛 기운’도 이런 오로라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밤에 기운과 같은 흰구름 한 줄기가 동쪽에서 일어나 곧바로 서북방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하늘 끝까지 닿았다. 남서쪽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인조실록 1625년 11월 14일)
“밤 1경에 기운과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서북방에서 일어나 남쪽을 향해 퍼져갔다. 남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4경에 같은 검은 구름 한 가닥이 서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동남쪽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하늘에 잇닿았다.” (인조실록 1626년 4월 3일)
오로라가 뿜어내는 흰 연기를 조선의 천문관원들은 흰구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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