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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개혁하려한 실학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15. 11:05


조선을 개혁하려한 실학 




■ 사농공상의 나라, 조선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어왔던 백성들의 신분과 직업을 나눈 것입니다. 사는 선비, 즉 학자이며 농은 농사를 짓는 사람, 공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 상은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이 말은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농공상 모두 같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사농공상은 서로 다른 신분으로 변하여 사용되었는데, 조선의 신분제도에 따르면 사농공상 모두 양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선비인 양반이 사농공상의 제일 위였고, 그 뒤를 농과 공이 따랐습니다. 상을 뜻하는 상인은 실제로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돈을 가지고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 하여 많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조선의 사,농,공,상(출처: 에듀넷)


하지만 사농공상을 지켜왔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라의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백성은 가난해졌습니다. 또한 몇몇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백성을 부자가 될 수 있게 하려면 조선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인 학문, 실학이었습니다.

 

 

■ 실학을 실현한 수원 화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몇몇 유학자들 사이에서 불기 시작한 새로운 움직임은 영·정조시기에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정조는 낡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임금이었습니다. 신분 차별에 막혀 능력을 펴지 못했던 서얼을 관리로 뽑고, 시전 상인만이 가졌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다른 이들도 자유롭게 상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던 정조에게 실학은 좋은 동반자가 되었고,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와 같은 실학자들을 자신 가까이에 두고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같이 연구하였습니다.

 

또 하나,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정조와 실학자들의 바람이 실현되었던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수원 화성입니다. 이 거대한 수원 화성이 건설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년 반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화성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먼저 화성에서 필요한 석재의 종류와 치수를 정해 규격에 맞는 돌을 가져오는 백성에게는 값을 치러주었습니다. 백성의 부담이기만 했던 자재확보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바뀌었으니 많은 백성들이 열심히 돌을 찾았던 것입니다. 또한 서까래용 나무는 민간목재상을 이용하여 상인들끼리 경쟁을 붙여 품질 좋은 목재를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성 건축은 실학의 거대한 실험장이었습니다. 정약용과 채제공이 화성축조에 투입되어 실학을 연구해 얻어낸 건축공법의 이용으로 엄청난 노동력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후기 실학은 화성에서 건축과 결합하여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실학은 정조의 죽음 이후 힘을 잃게 됩니다. 실학자들의 꿈을 실현시켜줄 임금이 없었고,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실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유지하려는데 있어 실학은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이 없는 학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바꾸고자 하였던 실학은 그렇게 현실에서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조선을 알아야 바꾼다

실용적 학문이었던 실학이 조선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약해진 조선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조선의 본모습을 알아야한다는 주장도 많았습니다. 중앙의 정치에서 멀어져간 실학자들 가운데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강하게 있었고 이에 따라 조선의 자연과 문화를 기록해 책을 펴고자 하였습니다. 명나라를 받들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명나라가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했으나 명나라는 청나라에게 중국의 주인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즉, 명나라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주실의를 통해 명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알게 된 실학자들은 명나라의 것을 따르는 것에서 벗어나 조선 스스로의 발전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실학과 관련된 서적들(첫 번째: 임원경제지, 두 번째: 대동여지도, 세 번째: 택리지)(출처: 에듀넷)


실학자들은 단순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거나,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지식이 책으로 나오면 많은 백성들이 그 지식을 공유할 것이며 좀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조선의 산과 바다를 알면 백성이 오고가기 편리하여 상업이 더욱 발달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이중환의 '택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조선의 산과, 바다, 백성의 삶을 생각한 실학자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양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서유구는 자신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알게 된 것과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농업 지식, 거기에 새로운 지식을 더해 '임원경제지'를 써 농촌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을 알고자 했던 이러한 움직임은 학문에서만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학의 발달과 같이 성장했던 명나라에서 벗어나 조선의 것을 찾자는 움직임은 예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 예로 조선 후기 발달한 진경산수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의 자연이 아닌 조선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 예로 금강전도는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선 '금강전도'(출처: 문화재청)


역사기록을 보면 실학은 실패했다고 이야기되지만 정말로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학자들의 생각은 그 이후에 계속 이어져 백성들에게 퍼져나갔고 이로 인해 결국 조선은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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