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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사회

병자호란과 북벌운동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20. 11:09


병자호란과 북벌운동 




■ 다시 시작된 전쟁 - 병자호란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선조 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광해군은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하고 나라의 힘을 키우는데 온 노력을 다하였고, 이러한 광해군의 노력으로 백성의 삶은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광해군의 실리적 외교(출처: 에듀넷)


위로 중국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지원군을 보낸 이후 국방과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쪽으로도 다툼이 계속되어 나라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여진은 점점 더 힘을 키워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울 만큼 강해져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두 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견디기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에 치우쳐 행동하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조선은 지원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지원군의 장수에게 상황을 잘 판단하여 행동하라 명했습니다. 이 같은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로 두 나라 사이에서 조선은 큰 피해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인해 쫓겨나고 인조가 임금에 오르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조와 인조를 도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했던 신하들은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에게만 예를 갖출 것임을 밝혔고, 명나라와 다툼을 벌이던 후금은 그러한 조선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조선도 쳐야한다고 생각한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합니다. 결국 후금은 후금에게 예를 갖추겠다는 조선의 약속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정묘호란 후 후금의 세력은 더욱 커져 마침내 청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위협함과 동시에 조선에도 압력을 가했습니다. 명나라를 도와 줄 것을 걱정한 청나라는 계속 조선에 압력을 주면서 청나라에게도 명나라와 같은 예를 갖출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1636(병자년)년에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정묘호란을 통해 조선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청나라는 거칠 것 없이 한양으로 들이닥쳤고, 청나라의 군대가 한양에 가까이 왔음을 알았던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청나라의 대군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남한산성에서는 신하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습니다. 청나라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조선이 항복하겠다는 의견을 전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임금이 직접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할 힘이 없던 인조는 스스로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입은 상처를 극복하기도 전에 다시 벌어진 청나라와의 전쟁인 병자호란은 한반도 곳곳에 극심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후 청나라의 무리한 조공 요구에 조선 왕실과 백성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갔습니다.



■ 실현되지 못한 북벌운동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나라는 조선의 두 왕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잡혀 있는 시간 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청나라와 많은 일을 의논하고 해결하였습니다. 또한 소현세자가 머물고 있는 집에는 청나라 사람뿐 아니라 서양 사람까지 드나들었으며 그들은 소현세자에게 새로운 문물을 선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을 통해 힘이 없는 나라가 겪는 어려움을 잘 알았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있는 동안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됩니다.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과 서양인 신부를 통해 서양 문물을 만나게 된 소현세자는 조선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청나라에 치욕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와 서양의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외래 문물 도입에 적극적인 소현세자(출처: 에듀넷)


소현세자의 이러한 생각은 인조를 매우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인조는 명나라와 청나라 둘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사람으로 청나라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이렇게 임금이 된 인조에게 소현세자의 생각은 매우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병자호란 후 겉으로는 청나라를 섬겼으나 속으로는 치욕스러워했기 때문에.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관계는 점점 불편해지게 됩니다. 그 후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 죽게 되고, 봉림대군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으니 이가 바로 효종입니다.


병자호란으로 겪은 고통을 잊지 않고 있던 효종은 군대를 키워 청나라를 치고자 하였는데, 이를 북벌운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군대를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또한 군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세금이 필요한데 그것은 고스란히 백성의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면서 발전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청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효종의 생각을 반대하였고 효종 역시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북벌운동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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