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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사회

양반들의 의식주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22. 14:06


양반들의 의식주



■ 조선 시대에는 사람도 등급이 있었다

사극을 보면 양반, 노비, 상민 등 신분에 따라 백성을 구분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이렇게 한 나라의 백성을 나누는 신분은 멀리 고조선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고조선의 8조법에는 도둑질을 한 자는 종으로 삼는다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에 종이라는 신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도 차이는 있으나 각 나라만의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려 하였습니다. 또한 신분 제도는 조선 시대도 존재했는데, 조선 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에는 크게 양인과 천인의 신분이 있었다고 기록 되어있으며, 실제 생활에서는 양인을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누었고 그중 양반이 조선의 지배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출처: 에듀넷)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신분과 비교하였을 때 양반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양반들의 생활 모습은 옷, 음식, 집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하지만 양반들의 생활에는 일정한 형식이 존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은 유교가 나라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양반은 유교를 공부하고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섰으며 유교의 원리에 따라 생활하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의 의식주 생활도 유교의 영향을 받아 절제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 양반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사극을 통해 보면 양반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습니다. 여기서 도포를 만드는 재료가 바로 비단입니다. 목화와 더불어 많이 사용되었던 옷감인 비단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만드는데 실 사이가 촘촘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색을 곱게 입힌 비단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옷감이었지만 가격이 비싸 경제력이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옛날부터 비단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중요한 무역품이기도 하였습니다. 비단을 잘 만들면 그만큼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은 나라가 적극적으로 누에를 치고, 비단을 만드는 일을 많은 사람이 하도록 장려하였고 왕비가 먼저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왕비 스스로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짓기도 하였으며 누에를 치는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서울의 잠실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누에고치를 치는 곳이었으며 거기에서 이름을 따 잠실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누에를 치고 비단을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즐겨 입는 옷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비단은 그 값이 비싸서 아무나 사서 입을 수는 없었습니다. 평민의 경우 값싼 목화로 만든 무명옷을 입었고, 양반 중 좀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었던 것입니다. 평민에게 옷이 그저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면 양반에게 옷은 생활의 한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신분을 과시하던 수단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경제력을 가진 양반일수록 품질이 좋은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고, 옷에 수를 놓기도 하였으며, 장신구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조선 시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이러한 경향이 심해져 의복에 사치가 심해지자 나라에서 화려한 치장을 금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양반가의 복장(왼쪽 그림: 양반의 복장, 오른쪽 그림: 장옷을 입은 양반가 여인)(출처: 에듀넷)


양반은 유교를 섬기고, 공부하였기 때문에 옷을 입는 데에도 유교의 원리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절차와 예절을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함부로 옷을 입지 않았고 단정한 옷차림에서 예절이 나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집에서도 옷을 갖춰 입었습니다. 또한 몸을 함부로 밖으로 내보여선 안 되기 때문에 여름에도 긴 옷을 입었으며 양반 여성의 경우에는 몇 겹의 속옷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더욱 옷차림에 신경을 썼는데 양반 여성은 장옷 등으로 최대한 몸을 감추기도 하였습니다.



■ 양반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조선시대의 양반들의 밥상은 어땠을까요? 현재 우리와 비슷한 상차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상차림의 기본은 밥과 국, 여러 가지 반찬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밥'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밥, 국, 반찬이 있는 상차림은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몇 첩 반상이라고 부릅니다. 첩은 반찬을 가리키는데 밥과 국, 초장, 간장, 김치나 찌개 등은 첩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밥, 국, 김치, 장류, 찌개, 찜이나 전골은 기본 음식이었고 거기에 나물이나 구이 등이 반찬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3첩, 5첩, 7첩의 상차림이 주로 쓰여 졌는데 보통 3첩이나 5첩을 즐겼으며 경제력을 가졌거나, 중요한 손님이 올 경우에는 7첩의 상을 차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9첩은 좀 더 신분이 높은 왕족의 상차림이었으며 궁중에서는 그보다 많은 반찬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양반은 같은 식재료나 같은 음식이어도 집안에 따라 다른 조리법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는 대를 이어 계속 이어져 현재도 어느 종가의 장이나 종가 음식 등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음식을 담는 것에도 정성을 다했으며 음식을 담는 그릇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흙으로 만든 일반적인 도자기 식기 이외에 유기 등을 사용하기도 했고, 떡이나 다식 등의 과자를 만들 때에는 다른 집과는 구별되는 무늬를 가진 판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간단한 음식을 만들 때에도 맛뿐만 아니라 멋까지도 생각하는 것이 양반의 식생활이었습니다.


▲양반의 상차림(출처: 에듀넷)



■ 양반들이 생활한 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공동주택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만들어진 집인 한옥은 우리 민족이 살았던 대표적인 집이었습니다. 한옥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집을 만드는 재료 또한 나무, 돌, 흙 등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한옥의 모습(출처: 에듀넷)


조선시대의 양반은 기와로 지붕을 올린 한옥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무로 기둥과 마루 등을 만들고, 볏짚 등을 섞은 흙으로 벽을 만들고, 흙을 구워 만든 기와로 지붕을 올렸습니다. 창에는 한지를 붙여 바람을 막고, 방바닥에는 한지를 바른 뒤 콩기름 등을 덧발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재료가 아닌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건강한 집이었습니다. 


 

▲한옥의 구성(왼쪽: 추운 지역 한옥의 구성, 오른쪽: 더운 지역 한옥의 구성)


한옥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데 추운 지역은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방을 겹겹이 배치했고, 따뜻한 지역은 집을 일자로 놓고 마루를 두어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양반이 살았던 한옥은 단순히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집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유교적인 원리를 실천하는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건물을 따로 지었고, 건물이 들어서는 위치도 일정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대문과 가장 가까운 쪽에는 행랑채가 있어 주로 하인들이 묵었고, 좀 더 들어가면 양반 남자가 생활하는 사랑채, 사랑채 뒤쪽에 안채를 두어 신분과 남녀에 따라 생활공간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전통적으로 이름이 있는 양반일수록 공간이 구별된 큰 기와집을 가질 수 있었으며, 집의 규모는 칸으로 알 수 있는데 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1평 남짓한 공간을 말합니다. 한 칸이 꼭 하나의 방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9칸의 집이라 하여 방이 9개인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의 방이어도 기둥을 2개 세웠다면 3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하여 지나치게 많은 칸을 가진 집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관직 등에 따라 가질 수 있는 집의 칸 수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 큰 양반집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99칸의 기와집은 큰 공을 세워 임금에게 선물로 받는 경우와 조선 중후반에 들어 큰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 소유하였습니다. 


기와집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집이기도 합니다. 처마나 지붕 등에서 느껴지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서까래, 방의 구조 등에서 느껴지는 직선의 아름다움은 서로 잘 어울렸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창문의 틀에도 문양을 넣어 아름답게 꾸몄으며, 집을 두르는 담과 굴뚝의 모양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문양을 넣어 꾸미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양반의 의식주는 단순한 생활이 아니라 그 속에서 유교적인 예를 실천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감각을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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