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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받지 못한 사람들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22. 14:35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 


  

■ 서얼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양반인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아버지라고조차 부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얼입니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가 합해진 말입니다. 적자가 정식으로 결혼한 양반의 아버지와 양반인 첫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가리키는 것에 반해 서자는 양반의 아버지와 양인 이상의 첩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며 얼자는 양반의 아버지와 천민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뜻합니다.


▲홍길동전(출처: 에듀넷)


여기 적자와 서얼간의 차별이 생긴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성계는 한씨와 강씨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한씨는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으로 이성계와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고 이성계가 권력을 잡기까지 많은 뒷받침을 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세력을 키우면서 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게 됩니다. 강씨도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과 딸을 두었습니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다음의 대를 이를 세자로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의 아들로 정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까지 큰 공을 세운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인 이방원은 이에 크게 분노해서 강씨의 아들을 모두 죽이고 맙니다.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선포했습니다. 이방원 자신이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로 인해 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서얼 출신 사람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이후 이것은 법으로 정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후 서얼의 자손들도 서얼로 신분이 세습되어 그 수는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나중에는 서자의 경우에 관직을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얼자는 그럴 수 없었고 양반의 자식이되 드러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홍길동전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서얼에 대한 차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서얼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해도 관직에 나가기 어려웠습니다. 경국대전에 서얼 출신들이 나갈 수 있는 관직의 한계가 있었지만 아예 관직에 오르기도 어려웠습니다. 양반들 사이에서도 서얼 출신들은 무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의 경우에도 서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에는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영조는 숙종과 궁중의 무수리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무수리는 궁중에서 가장 천한 신분으로 그를 어머니로 태어난 영조는 서자였습니다. 영조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왕이 되어서까지 많은 고난을 겪어야했습니다. 


능력 있는 서얼의 등용을 위해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는 계속되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조 때에 이르러 유득공, 박제가 같은 서자 출신의 사람들이 등용되었습니다. 이후 서얼에 대한 차별은 갑오개혁때 신분제도가 없어지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기생 

기생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화려한 옷차림에 장신구, 진하게 화장을 한 모습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원래 조선 시대의 기생은 고전 문화의 지킴이였으며 악기나 춤 등에 능한 예인이었으며, 가장 낮은 계급인 천민으로 취급되었으나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람들이이었습니다. 또한 기생은 궁중에서 연회가 열리거나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맞이할 때,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였으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신윤복의 그림으로 본 기생의 삶(왼쪽: 월하정인, 오른쪽: 상춘야홍)


기생은 재능이 많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고 절차를 거쳐야 기생이 될 수 있었으며, 기생이 되면 정식으로 관청에 소속되어 크고 작은 행사에 나가 분위기를 돋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생은 양반인 여자들조차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 가장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던 계층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진이와 이매창은 시를 짓는 솜씨가 뛰어났던 기생으로 지금도 작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생은 노래나 춤, 악기 등에 능한 예인인 동시에 지식을 탐구했던 지식인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생은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자신의 목숨도 함께 던지며 일본인 장수를 죽였던 논개도 기생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설 만큼 용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에도 기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생에 대한 이미지가 현재와 같이 부정적으로 바뀐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였습니다. 조선의 전통적인 기생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내며 가수나 영화배우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음식과 노래, 춤 등을 같이 즐길 수 있던 요정에서 일하게 되면서 기생의 이미지는 달라졌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예인이 아니라 술자리의 분위기를 돋우는 존재로서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기생이라 하면 천하고 좋지 않은 부류라고 인식 되었습니다. 예인이자 지식인이었던 기생의 삶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 백정


▲조선시대 천민(출처: 에듀넷)


조선 시대 가장 낮은 계층이었던 천민에는 8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노비, 기생, 백정, 광대,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이 그들이었습니다. 그 중 백정은 소나 돼지 등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같은 천민들 사이에서 조차 무시당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에 같이 살 수 없었으며 마을 가장 먼 외딴 곳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그의 자손들이 함께 살면서 소 등을 잡을 때만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외에 마을에 일이 있어 들어갈 때는 양반이 아닌 상민의 눈도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고 길을 걸어야했습니다. 


원래 백정은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사냥과 사냥감을 다루는 것을 잘했던 다른 민족이 조선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동물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굳어져갔습니다. 동물을 잡는 일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도 천하게 여겨졌고 무시와 차별은 더해져갔습니다.


결국 조선 명종 때는 무시와 차별을 참지 못했던 백정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그가 바로 '임꺽정'이었습니다.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신분에 대한 차별과 관리들의 가혹한 정치 등에 반발하면서 도적이 되었고, 관청이나 양반의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훔쳐 어려운 백성에게 나눠주어 백성들 사이에서는 의적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서얼, 기생, 백정은 조선시대 큰 차별을 당한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백성이었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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