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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서민문화

대한민국 교육부 2015. 7. 23. 14:33


조선 후기의 서민문화 




■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 사회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신분제가 흔들리고, 서민들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양반들의 것으로만 생각되던 문화를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조선 후기 서민문화가 발달하게 된 이유와 서민이 사랑했던 즐길 거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까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부 세력의 침입을 겪으며 조선 조정의 살림은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땅은 황폐해지고, 세금이 잘 걷히지 않으면서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정은 나라의 재정을 든든히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돈을 받고 관리직을 팔거나, 천민이 양민이 될 수 있는 면천첩을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제도를 통해 양반 중심 사회를 굳건히 했던 조선의 조정은 스스로 돈을 받고 관리직을 팔아 명예를 떨어뜨렸습니다. 또 세금을 내지 않았던 천민을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양민으로 만드는 것도 신분제도를 흔든 원인이 되었죠. 신분이란 것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라 믿고 그것을 따랐던 백성들은 신분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비춰진 임금과 양반들의 모습은 백성이 존경하며 따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임금과 양반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살 궁리부터 먼저 하는 모습을 보게 되죠.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면서 새로운 농사법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담배와 같은 새로운 작물이 재배되면서 농민들은 세금을 내고도 자신이 쓸 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전국적인 상업의 발달도 조선 사회를 변하게 했는데요. 조선 후기 나라 소속으로 일하던 수공업자들이 점차 관청 밖의 주문을 받아 물건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수공업자들 스스로 물건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하게 여겼던 조선이지만 새로운 물건을 접한 뒤 그것을 사고자 하는 백성의 욕구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 장이 열렸고 장을 따라 봇짐을 이고 장사를 하러 다니는 봇짐장수는 물건과 함께 다른 지역의 소식까지 가져왔습니다. 백성들은 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소식을 들으며 세상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로 서민들 중에도 재산을 많이 가진 이가 늘어났으며 자신의 재산을 바탕으로 양반의 신분을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는 것에 여유가 생긴 백성들은 단순히 먹고 자는 것에서 벗어나 즐길 거리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양반과는 다른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 지금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

홍길동전, 춘향전, 심청전 등의 고전 소설을 읽어본 적 있지요? 홍길동은 못된 양반들의 재산을 빼앗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신분의 차별이 없는 새로운 나라를 열었으며, 기생이었던 춘향은 사랑했던 이몽룡에 대한 마음을 목숨 걸고 지켜 내어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이 되었습니다. 또 가난하던 심청은 나중에 왕비가 됩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에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꿈꿨던 서민의 바람이 드러나 있습니다. 신분 차별이 없는 나라, 양반이 되거나 왕비가 된 여인, 크게 부자가 되는 것(흥부전)은 많은 노동력 제공과 세금을 내면서도 신분 차별로 양반의 무시를 당하던 서민들이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들의 꿈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설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서민의 즐길 거리였을 뿐 아니라 처음 나올 때 한자가 아닌 한글로 씌어진 소설이었답니다.


 

▲조선 후기 한글소설(왼쪽: 홍길동전, 오른쪽: 춘향전)


한글 소설들은 한자로 된 책에 비해 읽기가 쉬웠고 그래서 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세종 때 만들어졌으나 양반 사회의 반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훈민정음은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조정이나 관청에서 정식으로 쓰이지는 않았으나 궁궐의 왕자와 여인들은 친구나 친척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마침내 서민에게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배우고 읽기 쉬워 백성들에게 사랑 받았던 한글은 소설에만 쓰인 것은 아니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각종 책이 만들어 지면서 서민의 지식을 한 단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한글은 양반의 것이라고만 여겨져 왔던 수많은 지식들을 서민들 스스로 깨치게 하였고, 백성의 생각을 바꿔놓은 하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 지배층을 놀림거리로 - 탈춤

어린 시절 사자탈을 쓰면 진짜 사자가 된 것만 같고, 슈퍼맨의 탈을 쓰면 왠지 으쓱하고 힘이 세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들도 탈을 쓰고 이야기하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옛날부터 탈을 쓰고 놀기를 즐겨하였습니다. 도깨비의 탈을 쓰고 놀기도 하고 처용의 탈을 쓰고 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귀신을 쫓거나 나라의 안녕 등을 빌던 탈놀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그 내용이 조정을 풍자하거나 양반을 비웃는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춤과 흥겨운 가락, 거기에 자신들의 막힌 속을 뚫는 이야기까지 탈춤은 서민이 사랑할 수밖에 없던 놀이였습니다. 대놓고 양반을 비웃을 수는 없었지만 탈춤 안에서 무시당하고 놀림 당하는 양반의 모습은 서민들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신분제도를 비웃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탈춤은 주로 사람이 많이 오가던 장터에서 벌어졌으며, 수많은 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탈춤을 보면서 같이 웃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글소설과 탈춤 등의 서민문화를 통해서 신분제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던 조선 사회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서민문화는 서민들이 자신들도 양반과 같은 사람이며, 양반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나가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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