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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민서포터즈

탈의중이신 충무공을 만난 6학년 상우

대한민국 교육부 2010. 12. 11. 14:05



지난 달엔 온 나라가 연평도가 포격당한 일로 무거웠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열 세 살 만에, 우리나라가 휴전국가임을 이렇게 뼈아프게 실감한 날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떠오르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오늘 저 아이디어팩토리 상우 기자는 나라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준 해전의 귀재 이순신을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는, 광화문 광장의 <충무공 이야기>에서 직접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 '탈의중'이라는 문구가 써진 부스만이 있고, 거기에는 이순신 장군님의 옷도 걸려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던 자리


자, 그럼 <충무공 이야기>는 어디에 있느냐고요? 이순신 장군이 서 있던 곳에서 광화문을 향해 전진하면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 뒤쪽에 비밀스러운 출입구가 있고요, 그 길을 따라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세종 이야기>가 나오고 <세종 이야기>를 거쳐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님 박물관이 동굴 속의 호랑이처럼 우릴 기다립니다!



저는 문득 몇 년 전에 열광하며 보았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떠오릅니다. 우리 수군의 대포가 일본군의 배를 부술 때는 통쾌했었고, 이순신 장군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에는, 이불에 나를 말아서 울기도 했었죠. 요즘 같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저는 이순신 장군이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요? 그 이유를 여기 <충무공 이야기>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충무공 이야기>는 지하에 작게 만든 아담한 박물관이지만, 너무나 내용이 알차고 방대합니다. 저는 순간 이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취재하나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취재하고 싶은 욕심이 나서 2편으로 나누어 올리려고 합니다. 1부는 이순신 장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백성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나타내볼 거고요, 2부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맞아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분석해보고, 장군의 전략과 조선 수군의 우수성을 구체적으로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작지만 알찬 충무공 박물관 내부



 


 이순신 장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원래 자신이 먼저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 목숨 바쳐 나라를 위한다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로 그러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 드문 예 중에 단연코 으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나라의 미래를 예측해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나라를 위한 올바른 뜻을 굽히지 않아 시기를 삽니다. 저는 사상자를 내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이순신 장군의 행동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보름 전에 거북선을 완성하였던 것이죠!

거북선 모형



격군 - 거북선의 내부 모습

거북선 내부

 
저는 그것을 알고 난 뒤에 정말 장군이 안목이 뛰어난 비범한 사람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승리할 수 없는 전투를 거부해서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수군통제사에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그냥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저 같았다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왜적을 물리치고도 그런 모함을 당한다면 참을 수 없어 방방 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리고 시기하는 무리가 다음에 아쉬워서 나를 찾을 때, 괘씸해서라도 모른 척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한 후 조선 수군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위기를 느낀 선조가 다시 장군을 수군통제사에 임명했을 때, 장군의 태도는 어떠했던가요?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있사옵니다!"하며 나라를 위해 싸울 뜻을 강하게 하셨죠! 이순신 장군의 고귀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전쟁이 나면 백성은 얼마나 살기 힘들까요? 저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백성의 삶은 거의 지옥 같았다고 합니다. 왜적들은 조선 백성을 만나면, 무차별적으로 목을 베거나 코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전쟁에서 공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조금 남은 식량이라도, 조선 관군의 군량미나 왜적들의 끼니 용으로 마구 빼앗고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일삼아 백성의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처지에 백성이 의지할 곳이 어디 있었을까요? 왕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 여차하면 중국으로까지 피난 갈 처지였고, 어느 곳 하나 백성을 돌보는 곳이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죠. 그렇지만, 이순신 장군 아래에서는 무엇보다 왜적으로부터 안전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보호 아래, 전쟁 중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였대요! 놀랍지 않습니까?

장군이 군영을 옮길 때마다 백성은 장군을 따라가느라, 긴 피난 행렬을 이루어 다녔다고 합니다.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으로서 백성은 짐이 될 수 있었지만, 장군은 끝까지 백성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며 다녔습니다. 이는 전쟁 중에 백성을 사랑하는 장군의 인간성을 단연 돋보이게 합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결코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안전을 보호하려 온 힘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장군  

조선 시대 사화에 연류되었던 자손으로 태어난 이순신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 등용되기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군은 무과에 응시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우리가 아는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첫 번째 무과에서 실패하고 무려 4년 세월을 기다려 다음 무과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21살 때 이미 결혼한 몸이었죠.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무과를 준비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요?

좌절과 절망에서 등을 돌려라!

무과 급제 교지



 
그렇지만 장군에게는 꺾이지 않는 도전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 도전 정신이 임진왜란의 수 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이끈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을 임진왜란 중에 왜적에게 잃게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장군의 심정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래서 장군은 이놈의 전쟁이 싫어서 전쟁에 죽자사자 모든 것을 걸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만약 제가 혹은 여러분의 아들이 전쟁 중에 죽었다면 과연 온전히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저는 그 충격과 슬픔으로 정신병자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군은 먼저 간 아들의 죽음이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팠지만 우리 백성 한 명을 더 살리고자 하는 그런 정신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 아닐까요?


장군은 저와 비슷한 취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기를 썼던 것이죠! 비록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감정이 많이 삭막했을 법도 한데, 그가 일기까지 썼던 것을 보면, 싸움밖에 모르는 과격한 장군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전쟁터에는 일기 검사를 하는 선생님도 없고, 그의 일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팬들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스스로 일기를 쓰면서 전쟁으로 헐뜯기고 상처입은 자신의 내면을 치료했던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위대한 난중일기


다음 편에는 임진왜란의 승리와 조선 수군의 우수성에 대한 이야기, 2부가 이어집니다! 기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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