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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린 광화문에 얽힌 슬픔과 희망 본문
광복 65주년, 광화문이 새로 열리는 광복절. 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카메라를 들고 광화문으로 나갔다. 아니 광화문이 나를 부르는 거 같았다.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고 집에 있고 싶었다.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쏟아나는 정말 무더운 날씨, 그럼에도 나를 부르는 광화문의 외침.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화문의 부름에 이끌려 나간 것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길을 오며 가며 멀리서 바라다봤던 광화문이지만 그날의 광화문은 특별한 문이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닌 국운 상승의 기운이 한반도를 휘감게 하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원래의 모습이 아닌 비뚤어진 자세로 다른 곳을 응시했던 광화문이 다시 제 자리를 잡으면서 바쁜 일상을 사는 우리들의 비뚤어진 마음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목조 건물로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재탄생한 광화문 전경
광화문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중국 황제가 기거하며 국정을 돌봤던 북경의 자금성을 본 후, 기울어진 조선 왕실의 초라함을 슬퍼하며 중건을 결심했던 경복궁의 정문이었다. 중국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가마를 타고 수많은 문을 거치고도 한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 국왕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밖에서 돌을 던져도 맞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궁색한 모습에 대원군은 한탄하며 경복궁 중건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민중의 원성을 감수하고 당오전, 당백전을 발행했고, 또한 수많은 인력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했던 대원군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 집착했다. 마치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수많은 반대에 직면했는데 경복궁과 경부고속도로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왕실의 존엄을 세워 몰락하는 국운을 되살리는 일과 국가의 경제 동맥을 만드는 일 모두 다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한자로 다시 씌여진 광화문 현판
일제에 의한 의도적 훼손과 한국 전쟁으로 인한 화재 등을 거치며 광화문은 우리로부터 영원히 사라질 거 같아 보였다. 배고프고 힘든 상황에서 그 누구도 조선 왕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인 1968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현판과 함께 콘크리트 구조물로 광화문은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원래 광화문이 간직한 품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을 가진 광화문이었지만 콘크리트 구조물로서의 광화문은 큰 덕을 비추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번 광복절에 새롭게 선보인 광화문 현판은 고종 당시의 관리인 임태형이라는 사람이 쓴 것을 여러 가지 고증과 그 당시에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광화문은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는데 지금까지 봐왔던 한글 현판이 아닌 한자 현판이라 자못 낯설게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인 한글로 쓰였던 광화문 현판이 언젠가는 다시 그리워질 거 같은 마음이 싹튼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화문의 한글 현판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1995년 필자가 찍은 광화문과 조선총독부 건물의 전경
한 때는 중앙청이라고 불렸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도 사용되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이 오랜 논란 끝에 1995년 철거된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한쪽에서는 아픈 역사도 역사의 일부분이기에 그냥 보존하자고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구시대의 유물이며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본산을 해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둘 다 맞는 의견이었기에 과연 어떤 것이 더 타당한 답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서있는 세종로 한가운데서 사진을 찍어도 근정전이 보이지 않았고, 광화문은 기세에 눌려 남루해 보였으며, 조선 총독부 건물의 높은 첨탑만이 하늘을 거만한 자세로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비웃기나 하는 것처럼. 오랜 만에 15년 전에 찍은 사진을 찾아보니 더더욱 답답하고 무거운 모습이다.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던 광화문의 모습
콘크리트 구조물로서의 광화문은 언제나 슬퍼보였다. 외로워도 보였다. 도심의 공해를 한껏 뒤집어 쓴 채 언제나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광화문 안에서 밖을 내다봐도 왜곡되고 우울한 사회의 단면만이 보이는 거 같았다. 뒤틀린 광화문의 시선은 늘 모든 것을 올바르게 볼 수 없었다. 왜곡이 왜곡을 낳는 악순환의 풍경만이 광화문의 눈에 비쳤다. 그리고 한국 사회도 광화문이 뒤틀린 만큼 공정하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었다.
철거 직전의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직전의 총독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거만한 모습의 첨탑이 자아내던 교만한 웃음은 사라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죄인의 두려운 얼굴을 느꼈다. 그런 총독부의 초라한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내기 위해 광화문으로 나갔던 15년 전 그 당시의 나와 광복 65주년 광복절에 다시 열린 광화문을 찍기 위해 무더위를 마다한 나의 마음은 똑같은 것이었다. 15년 전에는 사라지는 총독부 건물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새롭게 열리는 광화문이 중심이었다는 것만이 차이가 있을 뿐. 한국 사회도 15년 전 보다는 훨씬 밝아졌다는 차이를 느끼며 광화문을 바라본다.
분리된 조선 총독부의 첨탑
광화문의 앞길을 지키고 있었던 해태상
광화문 양 옆에는 해태(2008년부터 해치라고 부른다)상이 있었다.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는 상상 속의 동물인데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이었다. 과자류를 만드는 회사의 이름으로도 유명했었다. 사실 해태는 불의 기가 센 관악산으로부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설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광화문 앞길을 지나갈 때면 해태 상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다. 어렸을 때 해태상의 등에 몰래 올라갔던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학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화재와 재앙을 막는 신성한 동물인 해태가 관악산 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혹자는 숭례문의 화재를 해태 상을 치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근정전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경복궁안의 건물을 복원하려는 작업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태조 이성계가 세운 경복궁이 백성들에 의해 불타 소실되었다는 경복궁에 대해서도 사실 여부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민중에 의해 불탄 것이 아니라 방화로 유명했던 왜군 장수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바로 잡혀야 한다.
파란만장한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온갖 풍파를 목격하며 훼손과 굴욕을 감내했던 광화문이 새롭게 복원되어서 기쁘다. 뜻 깊은 날에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니 더더욱 기분이 좋았고,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날 향해 미소를 짓는 거 같았다. 광화문 앞에 펼쳐진 세종로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보다 더 유명하고 멋있는 거리가 될 날도 머지않았다.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여 다시 복원된 광화문이 더 이상 역사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고 우리 앞에 당당히 미소 지으며 서있기를 바란다. 광화문과 경복궁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후세에 길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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