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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밥상으로 본 백성의 생활 ■ 공납과 진상세금은 나라의 운영을 위해 그 나라의 국민이 내는 돈입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도로를 개설하기도 하고, 복지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한 나라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세금인데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세금이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세금은 어떻게 냈을까요? 조선시대의 세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자신이 가진 땅의 넓이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 성을 짓는 일 등을 하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내는 것인데요. 조선시대는 백성 중 가장 많은 수가 농민이었고, 산업 중에서도 농업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땅에 대한 세금을 정하는 것을 두고 임금과 신하들이 많이 고민하는 등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
양반들의 의식주 ■ 조선 시대에는 사람도 등급이 있었다사극을 보면 양반, 노비, 상민 등 신분에 따라 백성을 구분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이렇게 한 나라의 백성을 나누는 신분은 멀리 고조선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고조선의 8조법에는 도둑질을 한 자는 종으로 삼는다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에 종이라는 신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도 차이는 있으나 각 나라만의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려 하였습니다. 또한 신분 제도는 조선 시대도 존재했는데, 조선 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에는 크게 양인과 천인의 신분이 있었다고 기록 되어있으며, 실제 생활에서는 양인을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누었고 그중 양반이 조선의 지배층을 이루었..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 7년간의 전쟁 - 임진왜란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일본은 우리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1592년에 시작되어 7년 간 계속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에서도 일본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1592년(임진년) 일본은 거대한 군을 이끌고 부산을 침략하였습니다. 20여 일 남짓한 시간에 거칠 것 없는 모습으로 조선을 공격하여 한양 도성까지 쳐들어왔고,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선조는 궁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20여 일만에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임진왜란 당시 시대적 상황(출처: 에듀넷)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지러웠던 일본을 통일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던 때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했던..
상민들의 의식주 ■ 조선 시대의 평민조선 시대 상민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계층이었습니다. 신분과 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소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럼 조선 시대 상민의 의식주 생활 문화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생활모습을 엿보도록 하지요. 평민이란 왕족이나 귀족의 지배를 받던 일반 계층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배를 받는 계층이지만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경제권 등을 가지고 있어 천민과는 구별됩니다. ▲조선시대 상민의 삶(출처: 에듀넷) 조선시대의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양인이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평민은 양인 중에서 상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평민과 상민이란 말을 구별 없이 쓰기도 하는데 조선 시대의 경우에는 두 말이 서로..
조선을 개혁하려한 실학 ■ 사농공상의 나라, 조선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어왔던 백성들의 신분과 직업을 나눈 것입니다. 사는 선비, 즉 학자이며 농은 농사를 짓는 사람, 공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 상은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이 말은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농공상 모두 같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사농공상은 서로 다른 신분으로 변하여 사용되었는데, 조선의 신분제도에 따르면 사농공상 모두 양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선비인 양반이 사농공상의 제일 위였고, 그 뒤를 농과 공이 따랐습니다. 상을 뜻하는 상인은 실제로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돈을 가지고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 하여 많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
뗀석기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먹도끼 이후에 새로운 석기를 사용했습니다. 바로 뗀석기인데요. 만능도끼였던 주먹도끼 대신, 용도에 맞게 돌을 떼어서 만든 것이랍니다. 떼어낸 방식이나 종류도 매우 다양해졌는데요. '도구의 사용'에서 '도구의 활용'으로 넘어간 것이죠. (사진출처: 우리역사넷) 뗀석기는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석기로, 전혀 갈아낸 흔적이 없이 떼기만을 이용해 제작한 석기입니다. 타제석기(打製石器)라고도 하는데요. 구석기인들이 강가나 들에서 적절한 돌을 구한 다음, 돌을 깨서 필요한 용도에 맞게 만든 것이에요. 사냥용 무기와 일상용 도구였습니다. 뗀석기를 만들 때는 돌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데, 석기의 질이 돌의 질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또 좋은 형태의 석기가 사용 목적에 맞게 잘 만들어..
주먹도끼 구석기 사람들은 어떻게 사냥을 하고, 고기를 손질 했을까요?바로 주먹도끼를 이용했는데요. 날카롭게 만든 면을 이용해 찌르고, 가죽을 벗겨 잘라냈지요. (사진출처: 우리역사넷) 주먹도끼는 끝은 뾰족하지만 손으로 쥐는 부분은 뭉툭해서 손으로 쥐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도끼 형태의 뗀석기입니다.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라고도 하는데요. (사진출처: 우리역사넷) 몸돌의 양쪽 겉면을 크게 떼어내고 가장자리 부분을 다듬어 날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 석기입니다. 전기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주먹도끼 이전에는 자갈돌의 한쪽 면을 한 방향에서 여러 번 쳐서 만든 초퍼(chopper), 그리고 자갈돌의 양쪽 면을 서로 엇갈린 방향에서 여러 번 타격을 가하여 만든 초핑툴(chopping-tool)과 같은 석..
삼국사기부터 울릉도 검찰일기까지, 독도관련 국내외 문헌자료는? ■ 삼국사기 ▲삼국사기(1145)(출처: 동북아 역사재단) 『삼국사기』권4의 지증왕 13년조에는 하슬라주(何瑟羅州, 지금의 강릉지역)의 군주인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복속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여지지(輿地志)에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하여 우산국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한 6세기부터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고려사 ▲고려사(1451)(출처: 동북아 역사재단) 우산국은 고려가 세워진 이후에도 고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우산국은 930년(태조 13) 이래 고려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고,..